테오:(차가운 빗방울 쏟아지는 하늘이 이쪽 방향으로 웃어 주기라도 했는지, 예상보다 수월하게 두 번째 소원을 이뤄 주고 나니 무심코 의식은 그 끝에 기다리고 있을 문장을 궁금해 했다. 분명 일은 뜻대로 잘 풀리고 있을 터인데, 한편에서 스멀거리는 초조함은 무얼까. 서늘하게 멎어 있는 입꼬리 근처로 손을 올려 문지르다가 주머니에서 지도를 다시 꺼내 마리나의 유추대로라면 이디스가 어디 즈음에 머물고 있을지 찾아본다.)
 
 :당신은 미묘한 기분을 뒤로하고 지도를 다시 펼쳐봅니다.
흠.
흐음.
채 답을 구하기도 전에, 낯선 기척이 느껴집니다.
이상합니다. …….
이 상황에서, 살아서 움직일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도. 숲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하고.
 
 
이디스:
은밀행동
기준치: 20/10/4
굴림: 43
판정결과: 실패
 
 :테오는 이에 관찰력 대항 판정.
 
테오: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100
판정결과: 대실패
 
 :?
최대 3 번까지 대항 판정합니다.
 
 
이디스:
은밀행동
기준치: 20/10/4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테오: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7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번 거 말고 직후 시도하는 다이스에 패널티 -1
어쩐지 눈 앞이 흐립니다.
하지만, 저기 있네요.
어떤 여자가 허리를 잔뜩 굽힌 채 시체를 질질 끌고 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척까지 느꼈는지, 곧장 시체를 놓고, 그 순간.
도망칩니다.
 
테오:(나타난 이가 누구인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으리라. 달아나려 속도를 내는 것을 보면 곧장 그 뒤를 따라 달린다.)
 
 :이디스는 나무 틈으로 숨고,
잡히는 나뭇가지나 잡동사니를 던지고,
진흙 웅덩이로 당신을 유도합니다.
 
 
이디스:(나 있는 숲길을 따라 이리저리 도망치면서, 거리를 확보하려 하나 끝내 지쳤는지 속도가 느려진다.)
 
테오:귀찮게 구는군. (혀를 차며 집요하게 이디스를 좇아 이리저리 달리다가 거리가 점차 좁혀지면 그 뒷덜미를 낚아채려 손을 뻗는다.)
 
 :한참 달려가던 이디스는 꺅! 소리를 내면서 당신의 손에 잡힙니다.
밝은 금발에, 짙은 회색 눈을 가진 그녀는 겉보기엔 멀쑥한 외모입니다.
그녀는 표독스럽게 소리칩니다.
 
 
이디스:당장 놓지 않으면, 당신 세계로 돌려보낼 거예요!
 
 :라고요.
 
테오:하. 뭐라고......? (한쪽 눈썹이 움찔이고, 가늘어진 눈매로 그를 노려보기도 잠시. 가벼운 날숨과 함께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며 손을 놓는다. 다시 그를 시야에 담았을 때는 여유를 위장한 은은한 미소를 걸친 채.) 나를 불러낸 건 네가 아닐 텐데. 역시 마법진에 장난질을 쳐 둔 건가?
 
 
이디스:(눈썹이 들썩이는 걸 보면, 그의 기세에 저도 모르게 흠칫 한 걸음 뒤로 물렸다.) 그걸 제가 당신에게 알려 줘야 하는 이유가 뭐죠?
 
테오:네가 날 돌려보내는 게 빠를지, 내 손이 네 목덜미에 박히는 게 빠를지 확인해 보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읊은 문장에 별다른 힘은 실리지 않았다. 자의가 아니라는 점과는 별개로 당장 돌아가는 것에 막연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더 휘어잡으려 들겠지.)
네가 내게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나도 네가 무얼 하든 관심 가질 이유가 없어.
 
 :당신은 평온한 표정과 목소리로 그녀를 위협합니다.
 
 
이디스:방해? 하. 내가 방해를 했다고요? 당신을 도운 거겠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뒤로 두 걸음 더 물러선다.) 그 손이 내게 뻗어지기라도 한다면, 닿기도 전에 당신 세계로 돌려보낼 거예요. 전 말했어요!
 
테오:(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가는 작게 웃으며 뻗을 의향이 없다는 식으로 양손을 들어 어깨 높이에 둔 채, 느릿하게 발을 뻗어 거리를 유지한다.) 나를 도울 이유가 있었던가? (섣불리 믿기 어려운 문장을 되짚으며 이디스의 표정 변화를 살핀다.) 시체는, 캥기는 구석이 없었다면 당당하게 거래를 하러 오는 편이 나았을 텐데 아쉬워.
심리학
기준치: 80/40/16
굴림: 7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디스:하, 나 참. 공생이라는 거죠. 거래를 할 필요가 있나요? 당신 일에 개입하지도 않는데. 당신이야말로 제가 뭐가 방해가 된다고 말하는 거예요? (당황스러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일순 두려웠던 것도 같으나, 그녀의 표정은 평온합니다. 정말 한결같이 자신 있다는 듯이.
먼 옛날, 어떤 인간 마법사가 외운 주문 탓에
당신은 이 세계에서 볼 일을 마치지 못하고 강제로 보금자리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주문이라도 알고 있는 걸까요?
이데 에타드의 추방…….
이라는 이름의 주문.
 
테오:그건 네가 그 시체들을 모아다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언제든 나를 돌려보낼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주제에 당돌하군. 내가 협조했다면 시체를 태울 일도 없이 운반까지 도왔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이디스:(당연히 저가 시체를 가져갔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반응에, 시선을 피하고 인상을 찌푸린 채 대답한다.) 그걸 제가 당신에게 알려 줄 의무는 없어요. 당신과 이만 더 볼 일도 없고요.
 
 :예상대로 소득 없는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겠군요.
 
테오:(믿는 구석이 있는 탓인지. 밝혀졌을 때 곤란해질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더라면 이리 평온하기는 어려울 테다. 대화로는 더 이상 진전이 없을 성싶자 손끝으로 턱을 두어 번 두드리더니 주머니에서 마리나의 지도를 꺼내 이디스에게 던진다.) 마리나라는 자가 네 뒤를 성심성의껏 밟고 있던데, 거슬리라고 살려 두었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해. 둘이 무슨 연인지는 몰라도 귀찮은 일에서 나는 빼 줬으면 좋겠거든.
 
 :이디스는 지도를 받아들고 펼쳐 보더니, 쳇, 소리를 내며 그것을 구겨 버립니다.
 
 
이디스:……. 그것 참 고맙네요. 알고 있으니까 당신이나 잘하시죠. (나는 나에게 할 일이 있으니. 여차하면 주문 대신 괴롭게 만들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도 몇 번이고 더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뒤돌아 걸음을 옮긴다.)
 
 :이디스가 도망치듯 자리를 뜬 바닥에는 작은 호리병이 하나 떨어져 있습니다.
실수로 떨어뜨린 모양이죠?
맨바닥이었으면 깨졌을 텐데,
비 때문에 땅이 물렁해져서인지 멀쩡합니다.
호리병에선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도 같고.
 
테오:
듣기
기준치: 50/25/10
굴림: 83, 67, 59
+2: 실패
+1: 실패
  0: 실패
-1: 실패
-2: 실패
 
 :호리병 안에선, 흐느끼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나치게 고통스러워 하는 목소리가.
세상이 잠겨 버릴 듯,
천천히 다시 빗줄기가 내리꽂힙니다.
은 조금만 걸어도 발바닥이 움푹 잠길 정도로 진창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대장간, 방앗간, 약초꾼의 집 등을 둘러볼 수 있겠네요.
 
 :아니면, 당신의 사랑스러운 계약자에게 가거나요.
두 번째 소원을 이루어주었다는 걸 들으면, 까무러치게 기뻐할까요?
그와 함께 마을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테오:(호리병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듣기에 퍽 나쁘지 않다. 그래, 일은 잘 처리되고 있으니 기우는 잠시 미뤄두어도 좋겠지. 질퍽한  위를 거닐어 나무 사이를 빠져나와거는 오두막으로 향한다. 지붕이라 불러 주기도 아까운 것에서 빗물이 고스란히 새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 역시 자신의 안위는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다는 건가. 검게 얼룩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살갗에 한기가 겹겹이 스미는 감각에 잠겨 있다가 마저 발을 옮긴다. 기뻐할는지. 어째선지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기뻐하기를 바라고 있었는지. 무심코 네 웃는 낯을 그려 보면 알 수 없는 기분에 미간을 찌푸린다.) ....... 궁금하긴 한데.
 
 :길을 내려다보면, 피와 비가 마구잡이로 섞여 흘러 붉디 붉게 물들었어요.
시체를 끌고 가던 그녀의 흔적일까……. 아니면,
전부 당신의 소행일 수도 있고요.
짓이겨진 나뭇잎들은 투명한 핏빛 물웅덩이에 둥둥 떠다닙니다.
 
테오:
관찰력
기준치: 50/25/10
굴림: 43, 25, 52
+2: 어려운 성공
+1: 어려운 성공
  0: 보통 성공
-1: 보통 성공
-2: 실패
 
 :성공.
저어기, 열 걸음만 걸어가도 닿을 멀지 않은 곳에 밑동만 남은 나무가 보입니다. 아래 한구석에 젖은 양피지가 떨어져 있네요.
이디스가 도망친 방향이에요.
 
테오:(철퍽이는 진흙 사이 그나마 단단한, 풀이 얽힌 땅을 밟고 걸어가 양피지를 줍는다.)
 
 :당신은 양피지를 줍습니다. 펼쳐 볼까요?
 
테오:(걷던 방향으로 마저 움직이며 양피지를 펼쳐 본다.)
 
 :양피지를 펼쳐 보면, …….
중간중간 피와 빗물에 잉크가 번져 온전히 내용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월계수 잎에 은을 싸둔 것을 현관에 걸어두면, 소원을 들어주는 악마들은 그 집의 가장을 직접 죽이거나 그 집의 일원에게 초대받기 전까지는 안에 발을 디딜 수 없다. (작은 글씨로 메모가 쓰여 있다. 마리나 이 기집애가 이걸 훔쳐봤어.) ……만약 대가로 받기로 한 영혼이나 육신이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었을 경우에는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 한다 …… 복수심에 가득 찬 여자들에게 주문을 알려주어 세상이 겁화에 휩싸이도록 ……… 상처 받고 남루해진 ………을 그러모아 잔악한 괴물을 만들어, 세상에 복수할 것이다, 필히, 필히.
 
테오:괴물이라....... (그 복수의 대상이 내가 아닌 이상 알 바는 아니다. 타인의 복수는 자신과 동족의 손을 빌려 처리하게 유도하는 동시에 자신의 복수는 이리도 번거롭게 진행한다는 것이 걸렸지만. 여럿 만났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 보군. 두루뭉술한 가능성을 머리 한편에 넣어 두고 양피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당신 일족은 늘 혼자 생활하니까요.
접은 양피지를 챙깁니다.
 
테오:(어쩐지 언짢아진 기분으로 빗길을 뚫고 오두막에 다가선다. 다시 마주칠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거기서 이디스에 대한 상념은 의식적으로 끊어 둔 채, 나무 문을 밀어 바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서늘한 온도의 내부에 발을 들인다. 돌아와 있겠다고 했지. 일부러 두고 나왔던 겉옷이나 우산 따위는 쓰고 왔을지, 공간을 둘러보며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겨 시야를 튼다.)
 
 :오두막까지 거리가 멀진 않습니다. 걸음을 차차 옮깁니다.
오두막 내부로 들어서면 다 쓰러져가는 의자 위에 몸을 맡기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스카이우스가 보입니다.
 
테오:그러게 그 집에 머물렀다면 편히 쉴 수 있었을 것을. (중얼거리며 스카이우스에게서 멀지 않은 곳, 무너진 잔해 더미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자는 모습을 지켜본다.)
 
스카이우스:(뚫린 천장으로 틈입하는 빗소리나, 중얼거리는 소리에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방금 잠에서 깬 시야가 흐려 목소리의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 꿈 속인가.) ……. 테디? (정신이 들어 벌떡 몸을 일으켰으나, 어깨를 덮은 겉옷을 떨어뜨리진 않고 소중히 쥔 채 뻑뻑한 눈을 끔뻑였다.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 감각이다.) 아, 돌아왔냐.
 
테오:(일전에도 나를 그렇게 부른 적이 있었지. 헷갈릴 거라면, 차라리....... 가늘어졌던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입매에 호선을 담고는, 손을 펼쳐 네 쪽으로 뻗는다.) 두 번째 소원을 이뤄 주고 온 참이야.
 
스카이우스:……. 그래? (실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손등으로 눈꺼풀을 무겁게 비비다가 천천히 그를 올려다본다. 복수, 소원, 그리고 계약. 지금 듣기에도 참으로 미련하고 달콤한 울림이다. 어딘가 한없이 씁쓸하면서도 담백하게 미소했다.) 잘 됐네. 구경이라도 하러 갈까. (이건 잡으라고 내민 건가? 내밀어진 손을 무덤덤한 눈으로 흘겨보던 나는, 모진 고통에 투박해진 내 손으로 덜컥 그 하얀 살갗을 쥔다.)
 
테오:(웃고 있는 것 같지 않은 그 미소가, 네 낯에 자리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을 텐데도. 그 이미지가 각막에 눌어붙어 메아리를 남긴다. 그래, 어쩐지 기뻐할 것만 같지는 않았지. 먼저 손을 내민 주제에 그것을 맞잡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꺼풀이 평소보다 둥글게 휘어 잠시 부유했다. 굳은살로 얼룩진 거친 피부를 말간 엄지로 쓸어 보았다가 곧 바닥에 떨어진 우산을 주워 문 쪽으로 너를 이끈다.) 그럴까. 마지막에는 전부 태워 버려 볼 만한 건 없겠지만, 부재를 확인하는 것도 구경이라 할 수 있겠지.
 
스카이우스:(접힌 눈매를 빤히 바라보다가 쳇,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을 돌렸다. 그가 무슨 손짭손을 하든 팔을 편히 내려 쥐었으나, 이끄는 손을 따라 사뿐사뿐 걷는 걸음은 으스러진 채 남은 뼈 탓에 덜걱거렸다. 습하게 말라붙었던 머리가 다시 젖을 시간이구나. 문이 부서진 좁은 틈새로 바깥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멀거니 올려다본다.) 숨이 전부 사라져 한적한 마을이 보고 싶어. 그래야 내가 여태껏 행한 호의가 의미가 없단 걸 스스로 확실하게 깨달을 테니까.
 
테오:(우산의 끝으로 문을 밀어 열고, 검은 하늘 아래 작은 지붕을 펼친 뒤 너와 함께 그 아래로 걸어든다. 네 증오가 차라리 나를 향한 것이었다면 달큰했을까.) 숨을 끊어 놓는 데에 큰 수고를 들일 가치도 없는 이들이더군. (빛이 들었다면 청량했을 정도로 시린 색과 핏빛을 닮은 붉은 것을 함께 품은 네 눈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던, 지금은 거대한 잿더미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있을 자리로 찬찬히 향한다. 아무도 없는 길 위를 걸어, 주인 잃은 집들을 지나.)
 
스카이우스:그럴 만했어. 그들이나 나나, 같은 인간이니까. 미움을 산다면 쉽게 스러지는 건 당연하지. (그게 어떤 이유가 됐든 말이야. 천천히 세상으로 걸어나오면 서늘한 시선이 가장 먼저 저 너머 마을에 꽂혔다. 빗물에 으깨지고 엉겨 늪처럼 뭉그러진 바닥을 짓밟고 지나가면 서서히 마을 초입에 들어서고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학살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숲길 직전 마지막 보이는 집 앞에 다다랐을 때, 그가 어깨에 걸쳐 주었던 옷가지를 고쳐 덮고 반투명한 우산 너머 실루엣만 보이는 빗줄기들을 올려다본다. 후련…… 한가. 왜인지 텁텁한 가슴 속에 못 이겨 입으로는 딴 소리를 뇌까리지만.) 비가 그치질 않네.
 
테오:비가 그치게 해 달라는 소원은 빌어도 들어 줄 수가 없는데. (장난기 곁들인 가벼운 소리를 돌려주며 마지막 집 앞에서 멈춰선다. 잿빛으로 문드러진 세상 속 색채를 홀로 독점한 것마냥 어여쁜 분홍빛의 머리칼이, 오두막을 나설 때보다 반투명해져 있다. 곧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을 것. 걷는 내내 그 위로 맺히는 빗방울의 개수를 세었던가.) 그래서, ....... (운을 떼고는 그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린다. 옅은 생의 흔적을 안고 자신의 체온을 탐하는 네 손을 고쳐 쥐려다 깍지 끼고는 남은 문장을 밀어낸다.) 세 번째 소원은 뭐지?
 
스카이우스:비가 싫은 건 아니야. 그저, ……. 영문 모르게 내내 질척이니까 신경 쓰이는 거지. 오지 않았다면 하늘 따윈 보지 않아도 될 일인데. (빗줄기는 곡선 같은 건 모르는 채 발등 위를 간지럽혔다. 얽힌 손마디가 따듯하단 착각이 들었던 건 내 숨이 진정 멎을 때가 되었다는 걸 반증하는 일일까, 아니면 사랑하던 남자에게 목을 매는 고통으로 아직 세상에서 떠나지 못하는 내 미련의 온도인 걸까. 그 애가 없으니 괜찮아,라고 사색에 빠져 있다가도 시선이 들리면 그의 얼굴이 들어온다.) 마지막 소원이라. …….
 
 :마을은 처참하게 멸망했습니다.
죗값을 가장 지독하게 치렀어요.
당신과 얽힌 손에 힘을 준 그는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구기고 팔을 떱니다.
가려져 있으나 그의 몸에 다시금 문양이 자라났을 겁니다.
두 번째 소원이 완료되었으니까요.
 
스카이우스:뒷맛이 좋지 않네. 이런다고 해서 있던 일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 하지만, 복수를 했으니까 이런 소리도 지껄일 수 있는 거겠지. (움츠렸던 어깨를 펴도 괜찮아질 만큼 고통이 멎었을 땐 울 것 같았는지 눈시울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굳센 듯 말은 했으나 조금 누그러졌단 건가.)
 
테오:(복수를 끝마친 인간의 씁쓸한 감상이라는 것 자체는, 그다지 희귀한 광경이 아니다. 복수를 다짐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국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마지막까지 붙들 수 있으려면 누가 되었든 자기 자신을 연료로 불태워 나아가야 하니. 다 타 버리고 남은, 시커먼 재를 집어삼켜 배 불리는 것이 악마의 몫이었다.)
당한 일이 억울했다 목소리 높여 보지도 못하고 묻히는 것보다야 낫잖아. (혀끝을 떠난 문장이 어색하다. 네 여린 분홍빛은 시들지 않았으면 한다. 고여 가던 아둔한 염원이 형체를 드러낸다. 그래서일까, 붉어진 눈두덩이만큼의 색채를 반겼다. 메말라 스러질 거라면 차라리 울고, 분노하고, 원망하며 아득바득 아침 해를 눈에 담거라. 서로 얽혀든 손을 조심스레 들어 뻗어진 검지로 네 곁뺨을 쓸어 본다.)
....... 후회해도 괜찮아.
 
스카이우스:위선이야? (뺨에 닿은 손길이 제 것과 겹쳐 있어도 살갗 아래까지 온기가 전해지는 것만 같다. 그가 날 살려 두겠다 말해도, 이 세상을 떠도 여한이 없다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후회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지만. ……. 방금 그 말이 진심이라면, 조금은 후회할 것도 같네.
 
 :그는 어쩐지 다시는 뜨지 않을 것처럼 눈을 감습니다.
그 반응에 열이 들끓고, 숨이 가빠지고, 초조한가요?
아직 안 되는데, 이 인간은 아직 세 번째 소원을 빌지 않았잖아요.
세 번째 소원을 들어 주지 않으면 영혼이고, 육체고 가져갈 수 없는걸요.
당신이 도망친 마녀를 쫓지도 않고 그를 보러 온 것은 그 때문이 가장 크겠죠.
어서 세 번째 소원까지 들어 주고 대가를 챙겨 이 세계를 뜨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돌보아 주었던 이들을 모조리 참살할 정도로 뿌리 깊은 원한을 품은 그를 손에 넣어, 암굴의 가장 어둡고 음침한 곳에 처박아 주면, ……. 최고의 찬사가 될 텐데도요.
그러나 되살아난 목표를 잃은 그는 아예 이번 생을 포기한 모양일까요. 수차례 빛 없는 저승의 강물에 까무룩 잠겼다가 간신히 떠오르기를 반복하던 그의 숨이. ……. 그럴 때마다 당신을 부르던 가냘픈 목소리가. 연약한 미소가. 맹목적인 애정이.
아마도 당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을 사랑이.
그는 미련을 담은 목소리를 뱉어내고 힘없이 당신의 품에 쓰러집니다.
악마, 계약자를 어떻게 할 건가요?
 
테오:(추락하던 빗방울이 허공에 얼어붙은 듯 흐릿하게 번지고, 서늘한 붉음이 팽창해 가는 동공을 옥죈다. 간신히 머리 위를 가려 주던 얇은 천이 흙바닥을 나뒹굴어 전신의 살갗이 차갑게 젖어들어도 감각 뒤편에서 어른거릴 뿐이다.) ....... 정신 차려. (아주 약한 숨결에도 꺼질 듯 위태로운 불씨가 품에 안겨들면 그것을 붙들어 흔들지도, 놓아 버리지도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움켜쥔다.)
어딜 감히 멋대로 죽으려고. 죽으면, 다시 살려내면 그만이야. 다시 죽으면, 네가 더는 살지 않겠대도, 몇 번이고, .......
(이토록 불안에 떨 이유가, 있었던가. 치가 떨릴 정도로 비이성적인 감정의 물결에 떠밀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네 전부를 품에 담고도 손아귀에 집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이를 바득 갈며 축 늘어진 사지를 자신에게 감고 가장 가까운 집의 문을 열어젖힌다. 귓전이 얼얼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이불보 위에 너를 뉘여 놓고 나서야, 주변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짓씹어 뱉는 음성이 목을 긁고 비어져 나와 바람에 흔들린다.) 스카이우스.
스카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호명합니다.
부르지 않으면 잊힐 것 같은 그 이름을 당신만이 부릅니다.
당신은 깨어나지 않는 그를 먹이고 곁을 지킵니다.
며칠 내내 이어지던 비가 완전히 그치고,
가까운 황야로부터 척박한 바람이 불어오던 어느 아침입니다.
스카이우스는 칠 일이나 걸려 간신히 눈꺼풀을 밀어올립니다.
 
 :당신과 눈이 마주하자마자 그는 설핏 웃음을 지은 것도 같습니다.
 
스카이우스:……. 테디.
 
 :낯익은 이름을 호명하는 목소리는 심장을 토막내어 담은 듯 애절합니다.
통곡을 교향곡으로 삼고, 절망을 보석으로 알던 당신이 아주 찰나 동안이라도 그 애정을 탐내고 싶을 정도로,
절박하게.
곧 당신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립니다. 저건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니구나.
오래 전에 죽었다던, 얼굴도 같은 애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겠구나.
이름도, 얼굴도 같은 악마가 소환되다니 운명이란, ……. 얄궂은 무뢰배들입니다.
 
테오:(살아, ....... 제발. 이 절박함의 끝에서 네가 세상을 놓는다면, 그 빈자리를 직면할 바에야 시간의 발뒤꿈치를 옭아매 영겁의 그리움 속 네 체온에라도 닿아 있고 싶었다. 고요한 입술 위에 부드러움을 그려넣고, 어둠 너머로 잠긴 두 눈에 봄을 피워내는 일은 내가 할 테니. 아무도 남지 않은, 죽음만이 홀로 어른거리는 마을에서, 모든 것을 씻어 낸 하늘이 쏟아붓기를 멈추기까지 그렇게 며칠이나 흘렀던가. 붙들고 있던 가녀린 손끝에 미세한 박동이 일자마자 고개를 퍼뜩 들어 너를 본다. 내가 아닌, 나를 닮은, 너를 가진 이를 부르는 시선과 마주친다. 그리곤 햇살을 머금어 따사롭게 웃는다. 부서질 듯 침음하던 그늘진 눈매가 곱게 휘어 나를 감추고, 네 짙은 미련에 발 맞추어 어울린다. 네 연정의 대상이 내가 아닐지언정, 새된 경멸만을 쏘아붙이더라도, 나를 바라보고 속삭여 준다면. 그거면 돼. 주어진 역할이 고작 망령의 그림자라 한들 너를 삼킬 수 있다면 기꺼이. 목구멍이 쓰리게 흘러내린다.)
응, 보고 싶었어, 스카이. 좋은 아침.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카이우스는 눈을 느리게 슴벅입니다. 스카이, 좋은 아침.
단정하게 울린 목소리가 꼭, 그 사람 같다고 느끼기라도 했을까요.
그의 흐리멍덩하던 시선이 또렷해지고, 푸르고 서늘한 정적 속에서 당신의 정체를 알아차립니다.
스카이우스의 눈에 담겼던 석양빛 눈동자는 어디론가 감추어집니다. 반질대는 눈은 죽은 것처럼, 어떠한 열정도 품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의미를 잃은 채 세상을 비출 뿐입니다.
 
스카이우스:……. (입을 굳이 떼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 것이다. 빛을 봐도 괜찮은지 따위에 되도 않는 자격을 재다 끝내 아침 빛이 술렁이는 창가에는 차마 고개를 내밀 수도 없었다. 나는 며칠을 죽어 있었지? 테디가 세상에서 어설프게 지워지고 제게 얼룩으로 남은 후로 난 테디를 묻어 주고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자살했다.)
(까무룩 잠들기 전 일들이 머릿속에 사무쳤다. 여기까지 온 것도 잘한 일이야. 그렇게 곱씹으면서. ……. 무언가 꾹 참는 듯 감쳐문 채 가파르게 떨리던 입술이 큰 숨을 내뱉었다. 이후로는 살아 있다는 걸 지독하게 증명하는 짧은 탄식이 입가를 가로막는다.) 하아아, ……. 아. (결국 홍채를 가리던 장막 같은 눈꺼풀 아래에 미련이 고이고 말았으니. 감정이라는 족쇄는 인간의 목을 옥죈다, 너무나도 쉽게, 너무나도 참혹하게.)
 
테오:(꿈결의 환상은, 현실에 닿는 순간 소멸하는 법이다. 더 이상 자신을 겹쳐 보지 않는 빛 꺼진 홍채가, 썩은 동아줄이, 악마를 떨군다. 추락하는 감각이 끓어오른 분노를, 뒤틀린 애정의 집착을 짓눌러 목 뒤에서 서늘하게 번진다. 나를 봐. 기어코 손을 뻗어, 고인 눈물을 숨기려 스스로 어둠을 불러온 네 창백한 낯을 감싸고는 자신을 향하도록 한다.) 나 좀 봐. 보고 싶었다니까? (살려 달라길래 살려 놓고, 죽여 달라길래 죽여 놓았다. 그럼에도 반대로 살아 달라 빌었을 때는, 너는 무엇을 속삭여도 죽을 채비만을 하고 있어서. 그래서 이리도 절박한 것일 테지.)
 
스카이우스:(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잡기 위해 눈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 있었다. 그는 어쩌면 마지막 소원을 기다리기 위해 내 곁에 남은 것 아닐까. 목적을 위해 잔인할 만큼 다정하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보고 싶었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네가, ……. 네가. (시선이 저를 향한 홍채를 마주하지 못하고 떨어졌다.) 네가 테디여서는 안 되잖아. (말끝이 흐려지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뺨을 쥔 네 손길을 타고 흘러내린다.)
(내가 사랑하던 인영과 그를 완전히 겹치지 않을 수 있을까, 과연, 해일보다 크게 밀려오는 운명의 장난질을 무시하고. 나는 이미 세 번째 소원을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당장이라도 떨쳐내기 위해, 그도 아니면 테디의 기억에 묻혀 죽기 위해.)
 
테오:원한다면 해 줄게.
(처참하게 문드러져야 한들, 그리하여 너를 묶어 둘 수 있다면 좋다. 연인이고 원수고. 네 깊은 바다의 미련에, 나에 대한 미련을 한 방울이라도 흘려 섞을 수 있다면. 노을을 담은 두 눈동자가 고통스레 점멸하고, 온전히 감긴 순간 행동은 사고를 건너뛴다. 인간을 질투해 버린 시점에서 운명은 이미 뒤집혀 버렸던 걸까. 고개를 숙여 까슬하게 부르튼 입술을 머금고 자신의 타액으로 축인다. 처음이 마지막이 되어도 아쉽지 않도록 느릿하게. 한 입밖에 남지 않은 달콤한 것을 음미하듯. 네가 응해 주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로 몇 번이고 거듭 살덩이를 맞대어 누르고 갈라진 것을 핥아올린다. 결국 자신의 것으로 삼키지는 못하리라 직감한 이를, 혀끝에 대어 보기라도 하고 싶어서.)
 
스카이우스:(두 개의 그림자가 겹쳤을 때 나는 지나치게 자연스럽게 그 온도를 착각하고 말았다. 마치 그가 나에게 연심이라도 품었다고 감각할 정도로. 눈을 감았다. 떨어진 눈물은 어쩐지 하늘을 잿빛으로 적시던 빗물 그 이상으로 습함이 잔존했으며 슬픔 그 이상으로 짭짤하고 애잔한 맛이 느껴졌다. 입술 새를 벌리고 그가 틈입해 주길 바란 것은 오롯이 내 의지일 테다.)
(흡, 숨이 조금 벅차오를 때, 물리적인 힘을 내는 것이 어려워 벌벌 떨리던 손끝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몸이 돌아가면 주인 모르는 거친 이불이 부대끼는 잡음이 천장을 향해 공간에 부유한다. 살짝, 살짝 떨어질 때마다 마지막 선언을 위해 얕은 목소리를 낸다.) 세 번째 소원, …….
(이 부탁을 고하면, 마침내 어떤 나락에 떨어진다 한들) 나를, ……. 사랑해 줘. (그 누구도 원망하지 못할 테다.)
내 유일이 그랬던 것처럼.
 
테오:(붉음 속에 자리한 검은 기대감이 부풀고, 네가 속삭인 문장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둥근 시야에 너를 담은 채 멈춰 있었다. 닿았다. 드디어, 어설프게나마. 갈비뼈 아래의 뜀박질이 박차를 가해 존재를 주장한다. 여전히 네가 내게서 보고 있는 이가 나일 것이라 확신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렴 좋았다. 어찌 되었든 네가 그 미련을 내게 매어 두었으니. 소원을 이런 방법으로 낭비하는 경우는 또 처음인데. 중얼거리며, 아까보다도 조심스러워진 움직임으로 입술을 부드럽게 맞붙이고 뺨을 어루만져 네 눈가에 드리운 머리칼을 넘겨 낸다. 벌겋고 푸른 세상이 물기를 채 떨치지 못해 사랑스럽게 반짝인다. 그리곤 너를 품에 담아 단단하지만 포근하게, 너무 힘을 주면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껴안는다. 시끄럽게 울리는 빗소리 대신 미약한 네 숨소리가 귓가를 채운다. )
사랑해, 스카이우스.
 
 :사랑을 빌기에 참으로 적절한 때와 장소이죠.
길바닥에 널브러진 원수들의 시체는 추깃물을 흘리며 썩어가고, 황야에서 불어온 불온한 바람이 모래먼지를 흩날립니다.
오래된 상처에서 흐르는 썩은 고름이 이부자리를 검게 적시는 날, 스카이우스는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합니다.
어쩌면 그에게 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사랑이 뭔지도 모를 텐데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탐욕이 앞섭니다.
허무하고 어리석은 그의 소원을 당신이 들어 주면 마침내 문양의 세 번째 획이 그입니다. ……. 이 가증스러운 계약은 완성되고, 또 완료됩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싶다는 소원이나 곳간의 곡식이 썩어갈 정도로 부자로 만들어 달라는 소원은 여러 번 들어 봤으나 일전에 그 누구도, 사랑해 달라는 우매한 소원을 빈 적이 없습니다.
 
 :소원을 들어 주는 마법이, 당신의 열망이 스카이우스에게 사랑을 심을 겁니다.
가슴 속에서 낯선 것이 피어오릅니다. 심장이 쿵쿵대고, 가슴이 따땃해지고, 뺨에 봄이 피어나고. ……. 아, 소원은 사랑을 강제합니다. 그러기 이전에 이미 사랑에 빠졌을지도.
인간을 사랑하게 되다니 이런 일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독하네요. 악마, 그래요 당신, 신화생물의 사랑을 구한 이 어리석은 인간을 어찌 해야. …….
그는,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겁니다. 스카이우스는 당신의 품을 어느 때보다 애틋하게 비집고 들어옵니다.
당신은,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순간임을 알 겁니다.
 
 :문양에서는 검은 연기가 꾸역꾸역 흘러나와 당신 품 안에 있는 스카이우스의 목을 목줄 감듯 감쌉니다.
자, 선택해야 합니다.
……. 당신이 취할 것은, 영혼입니까? 육신입니까?
 
테오:(아름다운 것들은 남지 못하고, 황홀경은 찰나에 소멸한다. 차마 너를 원망하지도 못했다. 거절하지 못할 소원을 빌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네게, 품어서는 안 되었을 감정을 품어 버렸기에. 결국 소원을 들어 주는 악마의 소원에는 그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법이다.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난 해질녘이 벌써 지평선 너머로 기울어 간다. 필연을 한 순간이라도 더 늦추어 보려 뜸을 들이고, 사랑하는 너를 감싸안는다. 어쩌면 이것이, 생명의 몰락에 기뻐하고 그 발버둥에 목을 축이며 살아 온 이에 대한 운명의 심판이렸다. 내 몫이 아닌 것을 탐낸 죄로 나는 영원의 끝에서 너를 그리워하겠지. 네 목에 걸어 주었던 목걸이를 풀어 그러쥐고, 일그러진 불꽃에 곧 사라질 마지막 네 모습을 담는다. 네 죽음이 내 사랑에 잠긴 것에 만족한다. 반대편에 비친 낯은 울고 있던가, 웃고 있던가.) 네 영혼을 내게 줘.
 
 :당신은 스카이우스의 영혼을 움켜쥡니다.
악마에게 사랑을 빈 발칙한 마녀, 잠깐의 복수심에 눈이 멀어 기꺼이 지옥을 자청한 어리석은 인간. …….
이제부터, 그를 품에 보듬어 아껴 주어야지.
가장 부드러운 비단으로 영혼을 감고 우주의 연주를 들려주어야지. ……. 그러나,
당신은 무구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당신의 손에 쥐인 스카이우스의 영혼이 흐려지고 흩어집니다. ……. 하얀 가루들은 인위적인 바람에 휩쓸려 멀리멀리 날아갈 겁니다.
 
 :지난 며칠 내내 지겨울 정도로 내리치던 벼락처럼 깨달음이 번뜩입니다. 손이 분노로 가볍게 전율합니다.
그래요, 이디스. ……. 그 여자가 마법을 알려 준 대가로 받겠다고 한 게, 설마.
스카이우스의 영혼이었나 보죠.
감히, 감히 내 것을 빼앗아가.
허나 그의 영혼을 쫓아가기엔 너무나도 늦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손아귀에 남은 것은 영혼 없는 육신. ……. 까무룩 닫힌 눈. 떨림이 멎은 입가. 싸늘하게 식은 피부, ……. 꼭두각시 같아.
 
 :어쩌면 좋죠.
고작 이 육신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만큼 그를 이미 사랑하게 되었는데.
……. 빌어먹을 세 번째 소원이 자꾸만 귓전에 울립니다.
 
나를 사랑해 줘.
 
테오:....... 제발, 안 돼. 스카이. 사라지지 마. 이렇게는. 이딴 식으로, 빌어먹을!! (생전 처음 느끼는 극도의 불안에 숨이 가쁘다. 어디서 엇나갔던 거지. 그를 죽여 놓았어야 했나. 차마, 너를 잃을까 두려워 내지르지 못했던 손이 이리 마지막 순간에 돌아와 자신의 숨통을 옥죄리라고는. 싸늘하게 식은 너의 유일하게 남은 것을 부둥켜 안는 손끝이 덜덜 떨린다. 그래, 네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전부 죽여 놓고 싶다는 염원이. 허망과 처절이.) 걱정 마. (스카이, 아직 네 복수에 마침표를 찍어 줄 준비가 되지 않은 듯하니. 바랐던 대로, 남은 것을. 그리 되뇌이며 흐려져 가는 시야를 네 가슴팍에 묻는다.)
 
END. C
 
그가 다시 한 번 나를 보고 웃어 주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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