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벽을 뚫고 2주가 흘렀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계획은 여전히 두 번째 벽 너머에 있는 설비 공간에 멈추어 있습니다.
 
설비 시설에 일가견이 있는 당신이지만,
 
교도소 평면도 없이는 환기구가 어디로 통하고, 어느 통로를 이용해야 또 다른 루트를 찾아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던 탓입니다.
 
식품 창고 너머의 설비 공간에 존재하는 환기구 개수만 30개가 넘어가고,
 
그 통로에서 갈라지는 분기만 50곳이 넘어갑니다.
 
게다가 정확한 루트를 찾는다고 해도 곧장 교도소 밖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또 벽을 뚫어야 하죠.
 
벽을 뚫는 데엔 필연적으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도 충분히 빠듯한 상황입니다.
 
교도소 평면도. 그것을 당장 구해야 합니다.
 
...
 
오늘은 교화 활동의 일부로 선교사가 교도소에 방문한 날입니다.
 
하여 오후 일과는 예배 시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교도관:점심을 다 먹은 재소자는 전부 예배실로 이동하도록!
 
교도관이 테이블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예배실로 통하는 문을 가리킵니다.
 
그에 밥을 먹던 로드릭이 당신에게 속삭입니다.
 
 
로드릭:카이, 죄송한데 먼저 가봐도 될까요? 오늘 예배는 꼭 앞자리에서 듣고 싶어서요.
 
평소 종교에 신실했던 로드릭이 반쯤 먹다 남긴 식판을 들고 물어봅니다.
 
카이 레스터:(로드릭의 말에 공감을 하진 못했지만, 딱히 잡아 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음식 우물거리던 입을 여는 것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다고 하자 로드릭이 화색을 띠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귓속말합니다.
 
 
로드릭:지금 티 내지 말고 고개 돌려서 뒤에 봐봐요.
 
카이 레스터:(어깨를 주무르는 척하며 고개를 슬쩍 돌린다.)
 
의문 띈 얼굴을 돌리자, 교도관과 함께 예배실이 아닌 감시실 방향으로 걸어가는 루주의 모습이 보입니다.
 
사방이 통창으로 둘린 감시실은 식당에서도 그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루주가 무료해 보이는 표정으로 교도관과 대화를 나누며 간간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로드릭:저번에 줬던 정보 기억해요? 당신이 찾던 준비물, 어디에 있는지.
 
지난번, 감시실 서랍 두 번째 칸에 교도소 평면도가 있다는 얘길 전해 들은 바가 있습니다.
 
 
로드릭:사실 루주가 교도관들 사이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특별취급받는 것 같길래, 요 며칠 유심히 지켜봤거든요?
그랬더니 저렇게 감시실을 종종 들락거리더라고요.
당신의 룸메이트니까 부탁 한 번 해보는 게 어때요?
 
그러고보니, 그거 부탁했었죠.
 
당신이 이미 부탁한 걸 로드릭은 모르겠지만요.
 
로드릭은 조금 기쁜 얼굴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로드릭:한번 고려해 보란 얘기였어요. 그럼 저는 먼저 갈게요! 천천히 드시고 오세요.
 
로드릭은 혹여 앞자리를 빼앗길라, 급히 나섭니다.
 
카이 레스터:(앞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진심이었는지, 자기 할 말을 우다다다 쏟아내고 서둘러 자리를 뜰 채비를 하는 로드릭을 미묘해진 표정으로 바라본다. 따로 이야기를 해 준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진지하지 않다 여겨 잊었던 걸까.)
 
글쎄요.
 
자주 들락거리는 걸 보면, 간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에게 물어봐야 알겠지만요.
 
카이 레스터:(어쨌거나 루주가 급작스런 변심을 하진 않은 이상 그가 감시실에 자주 오가는 것은 희소식이다. 한쪽 팔을 들어 턱을 괴고, 밍밍한 음식을 따분하게 씹으며 루주의 모습을 빤히 시선에 담는다.)
 
루주는 교도관과 이야기를 하다, 당신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리더니,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줍니다.
 
곧 교도관이 본인을 보자, 언제 흔들었느냐는 듯 굳은 표정을 유지하네요.
 
카이 레스터:(그러고 보니 함께 한 보름 동안 제법 친근해졌던가. 별 생각 없이 손을 마주 들어 보이곤 도로 굳는 낯에 키득거린다.)
 
그랬었죠.
 
제법 친근해져 이젠 인사도 곧잘 받아줍니다.
 
그럼, 슬슬 정리하고 예배실로 가볼까요?
 
카이 레스터:(늦게 합류하려나. 뒷자리에 앉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식판과 식기구를 반납하고 느릿한 걸음으로 예배실에 향한다.)
 
밥을 다 먹고 예배실에 들어서자 철제의자가 줄을 맞추어 나열되어 있습니다.
 
앞자리 쪽은 전부 평소 신실하게 신을 믿던 재소자들이 차지하고 있네요.
 
그 중에는 로드릭도 있습니다.
 
반면 뒷자리 쪽은 텅텅 비어있습니다.
 
카이 레스터:(팔뚝 뒤로 하품을 늘어지게 하곤 맨 뒷줄 왼쪽 자리에 비스듬히 앉는다.)
 
당신이 앉자, 옆 의자에서 끼익 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개를 돌리자 루주가 당신의 옆자리에 앉아있습니다.
 
둘의 주변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변에 앉을자리가 차고 넘치는데도 굳이 당신의 옆으로 다가와 앉은 겁니다.
 
카이 레스터:더 늦을 줄 알았는데 일찍 왔네?
 
루주:하모. 쓰잘데기 읎는 말들이었어가 끊고 왔다. 그짝들도 내 몬듣게 하믄 귀찮아지그든.
 
카이 레스터:(대충 납득하는 듯 살짝 올라갔다 떨어지는 눈썹 아래로 너를 보았다가, 너머의 텅 빈 의자들을 슬쩍 본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옆에 와 앉으리라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싫지 않았으니 굳이 추궁하지 않았다.) 잘했네.
요즘 자주 불려가던데.
 
루주:마아. 앞으로 2주 정도 남았으이까? 살 날이 말이여. 중간에 발광하믄 곤란하이까 신경 쓰는 기것지. 잘 있다가도 갑자기 휙 돌아삐는 기 사람이다이가.
조용히 살라 캐도 마, 그래 의심하믄 장난치구 싶은 기 사람 심리란 긴데. 안 맞나? (농담하듯 씩 웃으며 시선을 맞춘다.)
 
카이 레스터:너, ....... (굳이 태연하게 농담조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예방하려는 태도일 수도 있겠으나, 어쩐지 어울려 주기가 쉽지 않다. 곧 사라질 사람과 웃고, 몸 부대끼고,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이. 휙 돌아 버릴 만도 하잖아.) 괜찮은 거야?
 
루주:응? (눈을 몇 차례 깜빡이다 곧 웃음을 터뜨렸다. 시선이 몰리기 전, 살짝 소리를 죽이고서 고개를 까딱 한다.) 괘안치 않을 기 무어가 있것노. 내 사형수디. 그래 사람을 직있는디 내가 이래 될 끼라고 생각 한 번 안 혔것나.
 
카이 레스터:(말문이 턱 막혀 버리면 입을 달싹이다가 만다. 말만 들으면 매우 논리적이지만, 보통의 인간은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생명 소중한 걸 몰라도 스스로의 목숨만은 아까운 게 사람 마음이거늘. 주머니 속에 찔러넣었던 손을 지분거리며 시선을 정면의 큰 십자가에 둔다.) .......
제대로 못 들었는데, 뭐 때문에 들어왔어?
 
루주:(정면의 십자가로 시선을 돌리면, 자신 또한 비스듬하게 앉은 자세를 고치며 한참 이야기를 읊는 선교사를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눈은 한없이 무감각하고, 또 흥미 한 자락 갖지 못한 눈이라.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살짝 웃는 소리를 내었다.) 으음. 연쇄살인이란 건 알 끼고.
몇이나 직있나, 을매나 괴롭게 죽있나가 궁금한 긴가?
 
카이 레스터:(굳이 알 필요 없는 이야기를 캐물은 이유는, 마땅히 죽을 만한 짓을 했다 스스로 시인하는 것을 들으면 너를 덜 연민할 수 있을까 하는 이기심일 테다. 말을 해 주긴 할까. 목이 타는 기분에 무의식적으로 마른침을 삼킨다.) 응. 말하기 싫으면 말고.
 
루주:(눈꼬리를 둥글게 휘었다. 무엇을 뜻하고 묻는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마냥. 가볍게 웃는 소리를 내고, 다리를 앞으로 뻗으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이건 내 비밀이라가, 함부로 알리주기 쪼까 그른데.
 
카이 레스터:(고개를 돌려 웃는 낯을 본다. 살갑게 휘어진 눈매와 살풋 올라간 입꼬리. 그저 잘 웃는 녀석인 줄 알았더니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이 없으면 무료하게 굳어 있던 이목구비. 속이 울렁거려 도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살짝 젖힌다.) 그러냐~.
 
루주:어야. (발끝을 까딱이며 지루한 낯으로 너머를 보더니, 곧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무언가를 읊는다.) 그라고보믄, 내 이래 예배에 나오는 기 첨인 그, 니 알고 있나?
 
카이 레스터:아니, 몰랐는데. 전에도 주기적으로 하던 거 아니었어?
 
루주:주기적으로 했지마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믄서 안 나올라 캤그든.
그런데 오늘은, 니 탈옥 잘 되게 해달라꼬 기도나 하까 싶어가 왔다. (장난스레 웃으며 속살인다.)
 
카이 레스터:(눈꺼풀이 둥글어졌다가 두어 번 깜빡이고, 결국 피식 웃는다. 반은 어이가 없어서, 반은 네가 웃어서.) 신이 계신다면 연쇄살인범의 탈옥을 도우실 것 같진 않은데.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곤 비스듬히 턱짓을 한다.) 그럼 나도 온 김에 네 기도나 해야겠다.
 
루주:마, 기도하는 노마가 그보다 더한 노마니까 들어주지 않을라나? 갸륵해서라도? (장난스럽게 웃는 소리를 내고 상체를 기울여 턱을 괴었다.) 내 기도? 와. 죽을 때 덜 아프게 해달라꼬 기도라두 해줄라구?
 
카이 레스터:(시선이 너를 따라 이동하고 이번만큼은 자신도 한쪽 입가에 장난기를 걸친 채 어깨를 으쓱인다.) 그건 비밀. 나도 비밀은 있어야지.
 
루주:얼씨구. 내 비밀을 알리주믄 니도 니 비밀 알리줄라꼬? (둥글게 웃고서 어깨를 으쓱했다.) 마. 그래 해라. 니 좋을대로 혀야지.
맞다. 니 부탁헌 그, 내일 저녁 즈음에 갖다 주께. 그 전에 탈옥에 필요한 준비물 많이 구비해 두그라.
 
카이 레스터:(잊지는 않았구나, 어쩐지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곤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고맙다.
넌, 뭐. 나한테 부탁할 거 없어?
 
루주:고맙기는. 니가 부탁한 긴데 당연하제. (짧게 웃고 앞을 가만히 본다.)
음, 글쎄. 니가 탈옥에 성공하믄 그걸로 족한디?
 
카이 레스터:(여전히 웃음기 걸려 있는 옆얼굴을 시야에 담는다. 순수한 호의는 사람을 너무도 약하게 만드는 것이라. 아, 무언가 비뚤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진심이 아닌 말이 혀끝을 배회하면.) ....... 왜? 네가 무슨 상관인데?
 
루주:마, 확실히 니랑 내랑 여서 첨 보구, 아무런 관계도 읎지만…. (눈을 내리깐 채로 있다, 곧 고개를 들어 네 눈을 보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니가 멋지가? 이래 노력허는 노마를 보는 기 간만이그든.
 
카이 레스터:그게 무슨, ....... (시선이 맞닿으면 널 떼어내지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마른 세수를 하며 의자에 한 층 더 뭉개져 앉는다. 그대로 밀어올려진 손바닥이 눈가에서 검은 머리칼을 치워 내고, 두 눈을 천장에 둔다.) 나 안 멋져. 그냥 살아 보려고 발악하는 거야.
 
루주:그기 멋지단 기제. (잘게 웃는 소리를 내고서 뒤로 몸을 기울였다. 언제 똑바로 바라보았느냐는 듯, 느슨한 움직임을 보이며 무릎을 위로 접어 올린다.) 마지막에 가가 포기하는 노마가 세상에 을매나 많은 줄 아나. 어차피 해도 안 된다꼬 드러눕는 기 열에 아홉인디, 계속 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믓진 기제.
그래가 응원하게 되는 갑드라. 니를. 니가 성공했음 좋겠다. 그걸로 충분타.
 
카이 레스터:(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이건 선의 따위가 아니다. 그저 일방적으로 휘둘러지는 영문 모를 폭력적인 다정이라, 그 진위 따위를 캐묻기 시작하면 네게 질식할 것 같아 입을 다문다. 너는, 살고 싶지 않아?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문장이 뱉어지지는 못하고 기도에서 얼얼하게 부푼다. 나는 왜 너를 동정할까. 시선은 여전히 잿빛에 고정되어 있다.)
그래, 응원 고맙다.
 
루주:(킥킥 짧게 웃고 간단히 대꾸하며 연설을 한참 듣다, 다시금 툭 질문을 던졌다.)
그라고 보믄, 같이 탈옥할 사람은 있나? 예를 들자믄, 늘 같이 댕기는 그 두 사람이라등가.
 
카이 레스터:그 녀석들은 형량 얼마 안 남아서 얌전히 채우고 나가겠다나. 하나는 모범수잖아. (손을 휘적이곤 허리가 살짝 아팠는지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자세를 고쳐 앉는다.) 왜, 빈자리 있으면 탑승해 볼 마음이 생겼어?
 
루주:뭐? 하하! 내 말했다이가. 남은 생은 시선 끌 일 읎이 조용히 움직이고 싶다꼬. 니는 돕겠다만은. (웃음을 터뜨리고서 가볍게 손을 흔든다.) 내가 윽시 좋은갑네. 내를 이래 꼬시는 걸 보믄.
 
 
선교사:주님께선 우리를 늘 시험하십니다.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사탄의 꼬드김에 넘어가는지.
심판대에서 주님의 곁으로 가기 위해선 옳은 선택이 과연 무엇일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루주의 질문은 늘 의도가 불분명합니다.
 
그의 앞에서 당신은 시험에 드는 기분이 들 수도 있겠네요.
 
카이 레스터:꼬시는 거 알면 한 번은 넘어와 주지, 거. (선교사의 힘 실린 한마디 한마디가 한 귀로 들어와 다른 귀로 고스란히 빠져나간다. 네가 사탄이라면 이미 시험 앞에 무너진 걸지도 모르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옆 의자의 목재를 손끝으로 두드린다.)
 
루주:풋, 하하! (때마침 울리는 오르간소리에 맞춰 웃음을 터뜨렸다. 기겁을 하며 아니라 말할 줄 알았건만,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 퍽 귀여워 웃음이 났던 탓이다. 기도를 올리는 선교사를 따라, 눈에 띄지 않게끔 두 손을 올려 겹쳐쥐며 눈을 살짝 내려감았다.) 생각해보께. 니 말두.
 
선교사가 예배의 마지막을 알리며 기도를 올립니다.
 
고요히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루주의 옆모습이 시선 끝에 아로 박힙니다.
 
그는 신에게 무슨 부탁을 올리고 있을까요.
 
신의 탈옥을 기원해 주고 싶다는, 그의 말은 진심일까요?
 
카이 레스터:(생전 취해 본 적 없는 포즈를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흉내 내려니 어색하지만, 양손을 모아 엮으며 눈을 감는다. 신이시여, 계신다면.)
(복권 한번 사 보자는 심정으로 눈을 감으니, 막상 네 기도를 올릴 문장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흉악범의 안위를 빌다니 내가 드디어 미쳤지. 그래도, 계신다면. 범죄자도 가리지 않고 구원한댔으니까. 이 미련한 녀석을 살려 달라고.)
 
당신은 그를 위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래요.
 
흉악범을 위한 기도입니다.
 
바라는 이 하나 없는 기도를 올린 심정은 어떠한가요, 카이?
 
카이 레스터:(짤막한 묵념이 끝나면 도로 눈꺼풀을 들어올려 옆자리를 본다. 너는 무슨 기도를 올렸을지. 어딜 가서도 당당하게 밝히지 못할 그릇된 바람이 까발려진 기분이라 복잡미묘했다.)
 
그 기도를 끝으로, 오늘의 일과가 끝납니다.
 
당신은 점심을 먹고 여느 때와 같이 운동장에 나왔습니다.
 
당신의 곁으로 당연하다는 듯 로드릭과 에반이 다가와 앉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루주가 탈옥 도구를 넉넉히 구해놓으라고 했죠?
 
에반에게 미리 부탁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카이 레스터:(커피가 담겨 있던 싸구려 종이컵의 테두리를 질겅질겅 씹다가 에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여, 형씨.
별건 아니고, 좀 쟁여 둬야 할 것 같아서.
 
 
에반:뭐? 허어... 몇 개나?
나도 여럿 주고 싶지만 말이야. 한 번에 여럿이 사라지면 의심 받을 거라고. 알고 있지?
 
카이 레스터:알지~. 저번에 시비 털린 것도 있고, 무리한 부탁 하려는 거 아니니까. 적당히 무리 없는 선에서 최대한 챙겨 줘.
 
 
에반:쯧... 나, 참. 그놈은 왜 그렇게 널 싫어하는지, 원. (턱을 감싸고 꿍하게 있다 고개를 끄덕한다.) 다섯 개. 그 이상은 힘들어. 어떤 식기를 위주로 챙겨줬음 하는지 말해 봐.
 
카이 레스터:이 정도면 좋아하는 거 티 내기 싫어서 그러나 싶다니까? 아아, 그런 타입은 부담스러운데~. (헛소리를 즐겁다는 듯 늘어놓으며 킥킥거리곤 왼손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랗게 만든다.)
평소대로, 아니면 레이크 쪽으로. 좀 다양한 편이 좋아. 그래야 의심도 덜하지.
 
무리한 부탁이었나 싶지만, 에반은 고개를 끄덕이고 맙니다.
 
본인 입으로 다섯 개를 준비하겠다 했으니, 뭐.
 
지금의 상황에선 믿는 게 낫겠죠.
 
문득 고개를 들자 우리의 맞은편에 루주가 앉아 있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몇몇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긴 했지만 루주의 손짓에 금세 스쳐 지나가 버립니다.
 
덕분에 루주는 늘 그랬듯이 혼자입니다.
 
아니, 오늘은 좀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루주가 별안간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거든요.
 
그렇게…
 
…?
 
어라?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루주:카이.
 
느릿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당신을 부르며 지척까지 다가옵니다.
 
그의 시선이 당신에게 한번 닿고는, 양 옆에 앉은 에반과 로드릭을 차례로 훑습니다.
 
그러더니 곧 당신의 눈앞에 손을 내밉니다.
 
잡아달라는듯이.
 
카이 레스터:(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시선이 마주치고 약간의 뻘쭘함을 느끼고 있으면 정신 차릴 새도 주지 않고 다가와 이름을 부른다. 네 앞이라 그런지 당황해서 그런지 피부처럼 두르고 있던 위장이 한 겹 벗겨지고, 무슨 일이냐는 듯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들어 뻗어진 것을 맞잡는다.)
응, 왜?
 
딱히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 그의 손을 홀린 듯이 잡습니다.
 
그러자 그가 당신의 손을 꽉 붙잡고 힘주어 당깁니다.
 
저절로 자리에서 일어나진 상태로 그의 손에 이끌려
 
본래 그가 앉아있던 맞은편 자리까지 끌려갑니다.
 
당신을 옆에 앉힌 루주는 그제야 손을 놔주고는 왜 그런 얼굴이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정작 당신을 멋대로 끌고 온 그는,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이네요.
 
카이 레스터:......? 뭐야, 왜 그러는데. (할 말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잡았던 손에 무언가 쥐인 것도 아니다. 일단 이끄는 대로 얌전히 앉았다마는. 한쪽 무릎을 접어 걸치고 너를 비스듬히 바라본다.) 이 시간에는 혼자 있고 싶어하는 줄 알았더니.
 
루주:응, 그랬는디~ 기냥, 거슬리가. 앞으론 내 옆에 있는 기 낫다. 저짝, 질 나쁜 노마로 보이니까네. (에반 쪽을 턱끝으로 까딱여 가리키며 둥글게 미소를 걸어 웃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양, 담담한 웃음이다.)
 
카이 레스터:허. (눈짓으로 턱을 따라가면, 방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시선이 걸린다. 거리가 좀 좁혀졌다 싶으면 이렇게 영문 모를 소리를 하고,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녀석이다.) 뭐, 나쁠 건 없긴 한데.
그래도 도와주는 녀석이니까 너무 미워하진 마라.
 
루주:하하, 미워하기는. 기냥, 점마헌테도 별 생각 읎는데, 내는. (어떠한 관심도 없다는 것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 그러한 것을 여실히 드러내며 짤막한 웃음을 걸었다.) 그라고, 이짝에 붙어있는 기 편할걸. 닌테, 여러모로.
 
당신이 그의 곁에 앉자 수많은 시선이 쏟아집니다.
 
재소자뿐만이 아닌, 주변에 존재하는 교도관들의 눈초리도 무수하게 쏠립니다.
 
당신은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이것은… 강렬한 포식자가 피식자인 당신에게 진한 마킹을 남기는 행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당신에게 포식자의 냄새가 흠뻑 묻어있는 한, 다른 무리에 속하지 않아도 안전할 거라는 안도감.
 
카이 레스터:(원형을 잃고 너덜거리는 종이컵을 손안에서 굴리며 분위기를 읽는다. 회사 생활을 해 본 만큼 이 정도 눈치도 없는 건 아니었기에 금방 무슨 소리인지를 깨달았지만, 그렇다면 역시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떨어질 콩고물도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챙겨 줄까. 이미 반 접힌 것을 완전히 구겨 동그랗게 만들곤 잠시나마 가면을 벗을 수 있어 생긴 여유를 곱씹는다.)
넌 맨날 여기 앉아서 무슨 생각 하냐.
 
루주:(무료하게 앉아서 너머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한다. 하릴없이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지만, 그것도 썩 나쁘지만은 않다는 듯 얌전히 시간을 죽이다 말고, 목소리에 반응하듯 자연스럽게 미소를 걸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음~
우예하믄 니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지, 인자 무얼 하믄서 시간을 보낼지, 마지막 만찬은 무얼로 부탁헐지… 같은 생각을 헌다. 생각보다 재미 읎을낀데~
 
카이 레스터:별다를 건 없네. 그래도, 뭐. 어차피 재미없을 거면 같이 재미없기라도 하게 말해 봐. 네 이야기는 그닥 따분하지도 않고.
마지막 만찬, ....... 은. 뭐 먹고 싶어?
 
루주:아직 이주나 남았으니, 느긋하게 고민하까 했는데. 암만 생각해두 잘 모르겠는기라. (키득여 웃으며 턱을 괴었다.) 딱히 즐기 묵는 음식같은 건 읎읐그든.
커피…는 자주 마싰든가.
니는 누가 마지막으로 맛난 그 가득 묵게 해준다 카믄, 뭘로다가 부탁할낀데?
 
카이 레스터:글쎄. 나도 커피 말곤 딱히 목 매는 게 없어서. (잠시 고민하는 양 눈동자를 굴렸다가 너와 시선을 맞춘다.) 누구냐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여기 교도관 놈들이면 무조건 비싸고 손 많이 가는 걸로. 그래도 고기가 좋지 않겠어?
 
루주:니도 글나? 의외로 담은 점이 꽤 있네, 니랑 내랑. (둥글게 웃는 시늉을 하다, 고개를 까딱 들었다.) 음. 교도관들의 돈을 털어묵는 기라믄, 내도 그래하는 거에 찬성인디. 아마 나랏돈 아일라나? 마, 고기를 묵긴 하것지만.
 
카이 레스터:나랏돈도 털 수 있을 때 털어야지. (가볍게 웃으며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교도관을 쓱 훑어본다.) 근데 그게 아니라면....... 뭐든 좋으니 해 주고 싶은 걸로 직접 요리해 달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 같고.
 
루주:하하! 음, 정성이 가득 담긴 요리엔 관심 읎다. 거에 무신 짓을 할지 모르이, 차라리 시키 묵는 게 낫긴 허것지. (짧게 콧노래를 흥얼이다 말고 하늘을 보는 시늉을 한다.)
 
카이 레스터:아, 나도 저 녀석들 정성에는 흥미 없으니까 오해 마. ....... 먹을 거 얘기 하니까 배고프네.
 
루주:맞나. 내도 쪼까 배고픈 것 같기도 하고~ 오후 일과만 끝나믄 곧 저녁 시간이니까네. 쪼매 참그라.
 
……
 
그날 오후 일과를 마치고 식당에 들어섭니다.
 
사실 작업장에서도 루주는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당신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좀 떨어지라는 당신의 말에 “내가 싫어?” 하고 장난스레 대꾸하면서 끝끝내 옆 자리를 사수했죠.
 
당신이 루주의 바운더리에 속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 치고서도 과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그가 떨어져 준 때는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할 때입니다.
 
떨어지라고 할 땐 들은 체도 안 하던 그는 오히려 먼저 당신에게서 멀어져 교도관에게 다가갑니다.
 
루주:교도관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예.
 
 
교도관:…여긴 듣는 귀가 많으니 감시실로 가지.
 
그렇게 루주는 당신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눈짓을 보내고선 교도관을 따라 감시실로 들어갑니다.
 
식당에서 그 안쪽이 훤히 들여다 보이니 그가 어떤 식으로 교도소 평면도를 빼돌리는지 볼 수 있을텐데….
 
카이 레스터:(남은 시간 얌전히 보내고 싶다면서, 대범하기도 하지. 평소처럼 음식을 받아 자리를 잡으며 감시실에 들어간 루주를 유심히 지켜본다.)
 
카이 레스터:
관찰력
기준치: 60/30/12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루주는 그저 교도관과 심각해 보이는 대화를 나눌 뿐,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대체…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걸까요?
 
그때, 어느새 당신 곁으로 다가온 에반이 어깨를 툭툭 건드립니다.
 
 
에반:일단 이것부터 받아. 눈치 보여서 한 번에 못 가져왔어.
나머지는 다시 주방 들어가서 가져올게.
 
그가 가져다 준 식기는 세 개입니다.
 
하긴, 그도 그만의 사정이 있었겠죠.
 
카이 레스터:눈에 안 띄는 쪽이 좋지~. (대충 고맙다는 의미로 찡긋하며 식기를 받아 챙긴다.)
 
 
에반:그렇지. 그래도 조심해. 나 다시 간다.
 
카이 레스터:어어, 그래.
(손을 휘적이고 다시 감시실에 시선을 돌린다.)
 
에반이 나머지 식기를 챙겨주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간 사이,
 
다시 시선을 돌리면 감시실 분위기가 심상찮아진 것을 발견합니다.
 
루주와 대화를 나누던 교도관의 얼굴이 울긋불긋 붉어지더니,
 
돌연 교도관 봉을 휘두르며 감시실에서 뛰쳐나옵니다.
 
카이 레스터:(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에 당황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눈알만 굴려 상황을 파악한다.)
 
그의 봉 끝이 향한 상대는 막 주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던 에반입니다.
 
 
교도관:그 주머니 뒤집어 봐!
 
 
에반:예? 가, 갑자기 왜 그러시는….
 
에반이 당황하여 뒷걸음질을 치자, 교도관이 직접 다가가 에반의 주머니를 뒤집니다.
 
그곳엔 당신에게 마저 전해주려던 식기가 있었고….
 
 
교도관:모범수라 믿고 있었더니 뒤로는 이런 짓을 벌여? 당장 독방으로 끌고 가!
 
 
에반:교, 교도관님! 자, 잠깐…!
 
교도관들에게 두 팔이 잡혀 끌려가는 에반의 다급한 시선이 당신에게 닿습니다.
 
억울하다는 눈빛이 스쳤지만, 본인에게 증거가 발견된 이상 당신을 끌어들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축 떨구고 포기해 버립니다.
 
카이 레스터:....... (아무리 질 나쁜 범죄자라 해도, 자신을 도우려던 사람이 억울하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어쩐지 남은 음식이 목 뒤로 쉬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아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시선을 돌려 루주를 본다.)
 
감시실을 보면, 어라.
 
루주가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 방으로 돌아간 걸까요?
 
설마… 평면도를 구해주기 위해 에반을 팔아넘긴 걸까요?
 
카이 레스터:그래, 그 소원을 내가 빌긴 했는데 말이지. (중얼거리며 마른 세수를 한다. 이건 고맙다고 해야 하나, 말도 않고 뒤에서 멋대로 일을 벌인 것에 대해 화를 내야 하나. 그 평면도가 없이 탈옥은 꿈도 꿀 수 없으니 어찌 되었든 우선순위가 일치하긴 한 셈이다. 뒷목을 감싸 주무르며 식판을 반납하려 자리에서 일어난다.)
 
식판을 반납하러 가는 길에 시비는 없습니다.
 
다른 수감자들이 에반의 행적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있는 탓입니다.
 
덕분에, 당신이 일어남에 잠시 몰렸던 시선 또한 금방 와해됩니다.
 
카이 레스터:(루주를 너무 쉽게 믿었나, 고민해 보아도 자신이 경계를 세우거나 의구심을 품어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도 자신이었을 테다.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일단은 건네받은 세 개의 식기를 숨겨 두기 위해 수감실로 향한다.)
 
착잡한 발길을 수용실로 향하자, 그곳엔 역시나 루주가 있습니다.
 
그는 당신을 기다렸던 모양인지,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곤 팔짱을 낀 채로 나른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루주:쪼매 늦었네. 이거 원했던 것 맞제? (손에 들린 평면도를 나긋하게 팔랑 흔들어보인다.)
 
카이 레스터:........ 허, 재주 좋네. (주머니에 꽂았던 손을 빼내어 식기를 책상 뒤 구멍에 넣어 두고는 몸을 돌려 마주본다.) 그거 때문에 오늘 종일 붙어 있었던 거야?
 
루주:어야. 괜히 니까지 말리들믄 곤란하다이가. 안 맞나? (생글 웃으며 손가락으로 팔뚝을 톡톡 두드린다.) 내랑 있으믄 우선적으로 의심은 피할 수 있을 끼니께.
 
카이 레스터:(여전히 벙찐 기분이라 가늘게 좁힌 눈매로 너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꾹 감았다 뜨며 헛웃음을 짓는다.) 고마워, 덕분에 일이 훨씬 수월해졌네.
 
루주:생각보다 그래 기뻐뵈지 않네. 바라던 것 아이었나? 덕분에 바라던 것을 얻었고, 의심도 피할 수 있었는디 그런 표정이믄 내 섭한디~ (꿍얼거리는 시늉을 하다 흘끔 밖을 응시했다.)
마. 그래 마음 쓸 필요 읎다. 애당초 금마는 죄질이 나쁘이까. 모범수란 이유로 금방 밖에 나갔다간, 우떤 꼴이 되것노.
 
카이 레스터:(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맞는 말이지.) 그 녀석도 그 녀석이지만, 나한테까지 감쪽같이 숨겨 버려서 당황한 게 더 큰데.
그래서 정의감 때문에 내 탈옥은 돕고 있고?
 
루주:따지고 보믄 정의감은 아이제. 니도 내랑 같은 연쇄살인범이니까. (평면도를 건네며 눈꼬리를 길게 휘어 웃었다.) 말했다이가. 니 멋지다고.
 
카이 레스터:(멋지다는 건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적절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깨를 으쓱이며 평면도를 받아 살핀다.)
이렇게까지 가담해 놓고 수혜를 볼 생각은 여전히 없어?
 
루주:글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슥 들며 눈꼬리를 둥글게 휘어 웃는다.) 우예 보이노?
아, 슬슬 출발허지 않으믄 또 점호 시간 될 끼다. 퍼뜩 가는 기 낫것네. (바깥 시간을 확인하며 덧붙인다.)
 
카이 레스터:(딱 잘라 거절하는 게 아닌 애매한 답변이 돌아온 건 처음이 아니었던가. 종이에 꽂혀 있던 시선을 들어 그믐달마냥 접힌 눈매를 마주한다.) 어?
아아, 그래. 부탁한다. (자세히 확인하는 건 가면서 해야겠다 생각하며 평면도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익숙하게 책상 뒤의 공간으로 향한다.)
 
루주:어잉. 조심히 잘 댕기온나~
 
마치 출근을 배웅해 주는 신혼부부처럼 생글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 줍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입니다.
 
그래도 그가 구해다 준 교도소 평면도 덕분에,
 
식품 창고 너머의 설비 공간에 있는 30개의 환기구 중, 다음 루트로 향하는 환기구를 알아냈습니다.
 
그곳으로 이동하자, 예배실 뒤쪽 공간에 도달합니다.
 
불이 꺼진 예배실은 고요하고 또 한편으로는 성스럽습니다.
 
아치형 창문을 통해 아스라이 내려오는 달빛이 루주와 앉아 대화했던 자리를 가만히 비춥니다.
 
문득, 그가 건넸던 말이 떠오릅니다.
 
루주:오늘은, 니 탈옥 잘 되게 해달라꼬 기도나 하까 싶어가 왔다.
 
…이제까지 그의 행보를 보면 그 말은 의심할 여지가 없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에반을 팔아넘긴 행위는 어떻게 보아야 할지 고민스러울지도 모르겠네요.
 
카이 레스터:(아무리 옅어도 따스함을 머금은 햇빛과는 달리, 달빛은 아무리 산란해도 서늘한 구석이 있다. 예배실의 성스러운 구조물과 어우러져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공간 속에서 잠시 상념에 잠기니, 루주의 말에 자신이 무어라 응했었는지가 떠오른다. 결국 나는, 그가 살기를 바라나. 이 사회와 동떨어져 비정상적인 공간에서 비정상적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다 보니 무어가 바르고 무어가 괜찮지 않은지도, 이제는 모르겠다. 머리칼을 헤집고는 한쪽 벽을 짚어 쓸며 이곳에서는 어디에 통로를 구축해야 좋을지 살핀다.)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마따나 에반의 죄질은 극악하기 짝이 없었으니까요.
 
그 옳고 그름의 정의를 루주가 내리는 것이 맞는지는 불분명하지만요.
 
여하튼 당신이 그런 루주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가 건네준 교도소 평면도를 활용해야 할 때입니다.
 
카이 레스터:
자료조사
기준치: 40/20/8
굴림: 22
판정결과: 보통 성공
(평면도를 달빛 드는 구석에 펼쳐 놓고 머릿속에 들어 있는 공간의 구조와 대조한다.)
 
평면도를 잘 살펴보면, 예배실 왼쪽 벽에 꽃 화분으로 장식해 둔 벽을 뚫으면 그 너머에 설비 공간이 나타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의 특정 환기구를 통하면 오물 처리장이 나오고,
 
그곳과 연결된 폐수관을 이용하면 교도소 건물 밖의 하수처리장에 닿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감옥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실 벽면의 두께가 심상치 않습니다.
 
수용실 벽과 맞먹는 두께로, 식품 창고 벽을 뚫었던 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지만 다른 루트도, 방법도 없습니다.
 
몇 날 며칠이 걸리던 뚫어내는 수밖엔 없는걸요.
 
카이 레스터:여기서 이렇게, 이쪽으로....... (손가락으로 몇 번이고 루트를 그려 본다. 당장 뚫어야 하는 벽의 두께는 막막해 보이지만 이미 한번 했던 일을, 마음만 먹으면 두 번을 못 할 리가 없으니. 여기만 뚫으면, 진짜로.) 바깥이야.
(벌써부터 싱숭생숭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즉시 식기를 손에 쥐어 작업을 시작한다.)
 
카이 레스터:
민첩
기준치: 50/25/10
굴림: 69
판정결과: 실패
 
칵, 벽을 긁지만 썩 힘이 실리지 않습니다.
 
조금 더 힘을 주는 게 좋겠네요.
 
힘을 내요, 카이 레스터.
 
이것만 견디면, 정말 바깥이에요.
 
카이 레스터:
손놀림
기준치: 40/20/8
굴림: 74
판정결과: 실패
 
너무 간만이라 기술을 다 잊었나요, 카이?
 
괜찮아요. 열심히 갉아내면 됩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에요!
 
카이 레스터:(분명 이렇게 하면 더 잘 갈렸던 것 같은데. 숟가락을 고쳐 쥐고 벽을 긁어 댄다.)
손놀림
기준치: 40/20/8
굴림: 29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 드디어 차도가 보입니다.
 
당신은 기억을 더듬어 숟가락을 잘 고쳐쥐고 벽을 긁습니다.
 
투둑, 조각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집중하여 한참을 하다보면, 이런.
 
지금 시간이 몇 시죠?
 
벽이 너무 두꺼워서 한참 정신없이 파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도 몰랐습니다.
 
곧 점호 시간이니 서둘러 돌아가 볼까요!
 
돌아갈 때도 꽤 시간이 걸리니까요.
 
카이 레스터:(어느새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훔쳐 내며 한숨을 돌리자, 그제야 아차 싶었다. 루주가 얼버무려 주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서둘러 화분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식기와 평면도를 챙겨 수용실로 돌아간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구멍 근처까지 도착했습니다.
 
구멍을 통과하려고 막 머리를 들이밀려던 그때, 교도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교도관:6868은 어디 있지? 안 보이는데.
 
하던 행동을 멈추고 상황을 살펴보니 교도관과 루주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루주:이불 속에 있심더. 감기 기운이 있다꼬 일찍 잔다 카드마예.
 
 
교도관:…에반이 6868에게 주기 위해 주방 물품을 빼돌렸다고 하더군.
 
맙소사!
 
결국 에반이 사실대로 나불거린 모양입니다.
 
루주:고문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못 하겠심꺼.
 
 
교도관:고문도 안 통하는 놈이 입만 살았군. 이불 들춰 봐.
 
루주가 최선을 다해 변명해 보았지만 역시나, 교도관의 눈을 속이기엔 역부족인 듯싶습니다.
 
탈옥 계획이 결국은 이렇게…… 독방행으로 마무리되는 걸까요?
 
부스럭거리며 루주가 침대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차츰 당신의 침대로 다가오더니 미리 만들어 두었던 이불 둔덕을 뒤집…
 
지 않고, 생뚱맞은 말을 꺼냅니다.
 
루주:……약속은 잊지 않었심더.
 
약속……?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이지만, 교도관은 알아들은 모양인지 헛기침을 큼큼하고는 대답합니다.
 
 
교도관:큼. 알면 됐고. 기대하고 있겠어, 1049.
 
루주가 이불을 걷지도 않았건만, 그렇게 교도관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카이 레스터:(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바로 몸을 밀어넣어 돌아가도 됐겠지만 엿들어선 안 될 대화를 엿들은 기분이 들어 한동안 오도 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보름만에 거리가 좁혀져 봤자 얼마나 좁혀질 수 있었겠냐만, 그동안 워낙 살갑게 호의를 베풀어 준 탓일까. 유독 숨기고 있는 것이 많은 기분이다. 어렵네....... 작게 중얼거리며 고민하다가 왔던 길을 돌아가 예배실로 향한다. 시간을 벌어 준 김에 조금 더 작업을 진행해도 괜찮겠지.)
 
루주가 잠시 이쪽을 본 것 같지만, 뭐. 그렇지요.
 
새벽에 내도록 작업을 하면 조금 더 뚫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숟가락 하나 정도는...
 
희생할 각오로 뚫어보기로 합시다.
 
카이 레스터:(다시 화분을 치워 공간을 내고, 굳은살 배긴 손에 숟가락을 쥔다. 멍하니 단순 노동을 반복하다 보면 잡념은 자연스레 지워질 테다.)
 
카이 레스터:
손놀림
기준치: 40/20/8
굴림: 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팍.
 
당신은 열심히 벽을 팝니다.
 
이정도 두께라면, 부지런히 판다면 탈옥 전날까지라면 분명 너머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카이 레스터:(그동안은 별 생각 없이 파는 것에만 몰두했었는데, 이제 정말 코앞이라 실감이 나서 그럴까. 내려치는 동작 하나하나에 간절함을 담아 벽에 부딪혔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슬슬 쇳덩이에 맞닿은 살결이 쓰라리고 움직이는 와중에도 눈꺼풀이 스르르 감겨들 즈음, 바닥을 짚고 일어나 뒷정리를 한 뒤 수용실로 터벅터벅 돌아간다.)
 
수용실로 돌아가면, 루주는 이미 잠든 듯 조용합니다.
 
씻으면 깰까요?
 
모르겠습니다만, 찝찝한 채로 자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카이 레스터:(깊은 새벽이니 조심하면 괜찮지 않을까, 멍한 머리로 생각하며 의복을 한 겹씩 벗어 침대 위 둔덕 옆에 개어 둔다. 평소보다도 무리한 탓에 이대로 바로 누워 잠을 청하는 건 영 내키지가 않았으니. 졸린 눈가를 비비며 그대로 샤워 부스에 들어서 물을 튼다.)
 
당신은 샤워 부스에 들어가 물을 틉니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조금은 깨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니까, 물을 맞다 잠들 일은 없겠네요. 다행입니다!
 
카이 레스터:아....... (뜨끈한 물줄기를 맞고 있으면 뒷목에서 저릿한 기운이 퍼지며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이대로 잠들어도 나쁘지 않을지 모르겠다는 아둔한 생각이 1 초 정도 스쳤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거품을 낸 뒤 꼼꼼하게 헹군다.)
 
당신은 따끈한 물에 몸을 헹굽니다.
 
잠이 좀 깨나 싶었는데,
 
샤워부스가 뜨끈해지자 잠이 몰려 오는 것도 같습니다.
 
카이 레스터:(구석구석 몸을 마저 씻어 내고 김 서린 유리 문을 밀면, 급작스레 밀려 들어오는 한기에 어깨를 바르르 떤다. 샤워 부스 옆에 걸려 있던 수건을 낚아채 몸의 물기부터 재빨리 닦아 내곤 그것을 머리 위에 얹은 채 옷가지를 찾는다.)
 
당신이 머리 위에 수건을 얹고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뒤에서 옷가지가 불쑥 들어옵니다.
 
루주:아나. 이짝. (흐암. 길게 하품하며 옷가지를 건넨다.)
 
카이 레스터:으악......! 까, 깜짝이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칠 뻔했던 몸을 돌려 부딪히는 것을 피하느라 무게 중심이 휘청거린다.)
너, 자는 줄 알았는데.......
 
루주: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는디, 씻는 소리에 깼다. (하품을 다시금 이으며 옷을 팔랑했다. 안 가져가느냐는 듯.)
 
카이 레스터:(자신의 머리 위에 얹혀 있던 수건을 홱 던져 시야를 가리고는 옷을 채가다시피 해 돌아서서 주섬주섬 팔다리를 넣는다. 불 다 꺼져 있어서 망정이지, 진짜.) 사람 그렇게 놀래지 좀 마라.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루주:(어풉.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아래로 떨어지는 수건을 받아 자신의 시야를 얌전히 가리는 시늉을 했다.) 아이, 소리소문 읎이 들어온 기 눈데. 기껏 도와줬드마는 또 이런 반응이제~
 
카이 레스터:자고 있을 것 같아서 안 깨우려고 조용히 들어왔지....... (옷매무새를 다듬고 나서야 수건을 도로 달라는 듯 끄트머리를 잡아 가볍게 당긴다.) 아까는, 고마웠다.
 
루주:맞나. 고맙다 캐야 할지, 무어라 해야 할지~ (장난스럽게 웃는 소리를 내고서 수건을 순순히 건네주었다.) 아까? 아, 왔었나? 니 아적 도착 안 헌 줄 알었다.
 
카이 레스터:아, 그. 으응. (건네진 수건을 받아 아직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비벼 내며 대답을 얼버무린다. 숨겨야 할 짓을 한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죄 지은 마냥 굴고 있는지.) 저거 잘 먹히네.
 
루주:(의아한 표정을 짓다 고개를 돌려 둔덕을 보더니 짧게 웃었다.) 맞제. 생각보다 잘 속아 넘어가드라고. 마아, 내가 기술이 쪼까 좋긴 하다만은.
 
카이 레스터:....... (물어볼까, 말까. 그 짧은 순간 안에 마음이 수십 번은 갈팡질팡했던 것 같다. 아직 덜 마른 머리 위에 수건을 가로로 걸쳐 둔 채 어둠 속에서 은빛 홍채를 찾아 시선을 굴리고, 결국 내뱉은 것은 영 생뚱맞은 소리다.)
비밀 하나 알려줄까.
 
루주:응? (조금 뿌듯한 낯으로 형체를 바라보다, 은빛 눈동자를 살짝 굴려 수건 아래의 검은 홍채를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보인다면, 조금 웃긴 이야기인가.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시늉을 하더니, 곧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읊었다.)
어야. 싫다 할 이유는 읎지.
 
카이 레스터:나 사람 죽여 본 적 없어. (툭 던져진 그 아홉 자를 입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생각보다 너무도 버겁고, 동시에 너무도 쉬웠다. 뱉은 직후에는, 농담으로 들어 주었으면 했다. 헛소리로 치부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믿어 주기를 바라는 모순된 애원이라. 의미 없을 긴장을 삼키면 울대가 들썩이고, 눈동자가 떨렸을지도 모른다.)
 
루주:(눈을 둥그렇게 뜨고 몇 차례 깜빡이다, 곧 흠. 길게 침음을 뱉더니 제 턱을 가볍게 감쌌다.) 맞나. 하모 누명이라도 썼는갑네.
진범의 인상착의는 기억하구 있나?
 
카이 레스터:(끔벅, 내려앉았다가 올라가는 눈꺼풀이 검다. 되묻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내일 저녁 메뉴는 비프 스튜라는 말에 더 놀라겠다 싶은 반응이 돌아온 탓에 오히려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이쪽이다.) 아니, 잠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대체 뭘 믿고?
 
루주:응? 하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혹여 다른 이들이 깰까 목소리를 조금 죽인 채로 느슨히 만 주먹으로 입가를 살짝 가렸다.) 어야. 아무렇지도 않네. 그래 많이 직인 노마 치고는 이짝서 윽시 위축되어있는 기 보였그든.
그라고, 식당서 시비 걸릴 때도 말여. 공격하려던 폼이 크게 익숙해뵈지 않드마. 연쇄살인범인디 말이 안 된다고는 생각허구 있었으이까네.
 
카이 레스터:....... (전부 타당한 이야기다. 그렇게까지 티가 날 줄은 몰랐었지만서도, 관찰한 것을 기반으로 도출해 낸 근거들. 나열해 놓고 보면 뭐 그리 어려울 게 있을까 싶은 문장들인데. 왜 네게서 처음 듣는 걸까. 보송한 천 위로 손바닥을 문질러 젖은 머리를 헝클여 놓고는 끌어내리며 매트리스 위에 풀썩 앉는다.) 왼쪽 다리를 절었어.
머리는, 나처럼 새카맸고.
 
루주:꽤나 특징적이네. 그래 특성이 있는 노마를 두고 와 엄한 노마를 여따 갖다 박아놨는진 모르것지마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고서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침묵하다, 마저 이야기 하라는 듯 손을 내리고 시선을 마주했다.) 어야. 그라고?
키는 니랑 비슷했을라나? 이래 데꼬 온 그 보믄.
 
카이 레스터:그으렇지 않을까? 다른 건 나도 잘 기억 안 나. (무얼 그리 생각하는 걸지, 골몰하는 낯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눈가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쓸어넘긴다.) 근데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루주:(새까만 눈동자를 가만 바라보다, 곧 살풋 웃었다.) 비밀이다.
안 피곤하나? 내일 일과도 소화해 내려믄 퍼뜩 움직이야 쓸 텐디.
이만 자야제.
 
카이 레스터:비밀 투성이라니까. (가벼운 불만을 토로하듯 입을 비죽인 것은, 재차 물어도 말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서일 테다.)
어어, 자야지.
 
루주:마아…. (제 턱을 툭툭 두드리다 슬쩍 웃는다.) 마지막 날에는 말해주께. 얼른 자라. 내일도 준비 혀야지.
 
카이 레스터:(싱긋 웃는 낯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가 곧 뒤로 벌러덩 눕는다.) 그래라. 너도 마저 자고.
 
루주는 당신에게 가볍게 인사를 남기며 2층으로 올라섭니다.
 
곧이어, 금방 그의 잠든 숨소리가 들리고...
 
당신 또한 잠에 든다면, 잠에 빠져듭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 새벽에 드디어 두꺼운 예배실 벽 너머를 보고 말았으니까요…!
 
아직 사람이 지나갈 만큼의 크기는 아니지만 아마 오늘 밤에 작업하면 온전히 뚫릴 것입니다.
 
평면도를 닳도록 살펴본 바, 이후로는 뚫어야 할 벽이 없고 단순히 길만 잘 찾아가면 됩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탈옥이 어느 순간 눈앞으로 바싹 다가온 것입니다.
 
내일은 그렇게나 기다렸던 탈옥 실행일.
 
설레서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내적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그때,
 
별안간 철컹! 소리와 함께 수용실 철문이 열립니다.
 
 
교도관:들어가.
 
루주가 이른 아침부터 교도관에게 불려 갔다 온 모양입니다.
 
그는 제 침대로 가지 않고, 당신이 아직 잠자고 있는 줄 안 건지 다가와서 어깨를 가볍게 흔듭니다.
 
루주:점호 알림이 울린 기 은젠디 여즉 자고 있노. 인날 시간이디.
 
카이 레스터:일찍 일어났네. 불려갔다 왔어?
 
평소였다면 쌓아온 동료애만큼이나 부쩍 친해진 루주가 이런저런 말을 하며 장난을 치거나 했을 텐데…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습니다.
 
표정도 평소보다 조금 울적해 보입니다.
 
루주:어야. 내 내일 사형 집행 날이니께.
 
카이 레스터:.......
(줄곧 덤덤하게 이르던 목소리에, 질리지도 않나 싶을 정도로 웃어 보이던 얼굴에 쓸쓸함이 드리워져 있다. 그게 그냥 싫었다. 충동적으로, 가슴께를 덮고 있던 이불을 옆으로 밀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나 네 팔을 붙든다.) 야.
너 죽고 싶은 거야?
 
루주:(조금 당황한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붙잡힌 팔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그것을 뒤로 당겼다.) 아이,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있다구. 그런 건 아이다.
지금 중요헌 건 그게 아이고~ 내일 아침 특식으로 뭘 먹고 싶은지 교도관이 묻드라. 니 말대로 준비하기 귀찮은 걸로다가 했다.
 
카이 레스터:그럼, 왜, ....... 같이 나가자니까? 하. (옷감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지고, 대놓고 말을 돌린다. 손을 들어 눈두덩이 위를 지긋이 누르고, 한참 이어진 침묵 끝에 무어라 혼자 중얼거리는 듯하더니 출입구로 향한다.) 그래, 맛있게 먹어라.
 
루주:(입술을 달싹이며 열었다가 닫고, 짧게 한숨을 내쉰다. 드물게 초조한 낯을 지었다가도, 곧 체념한 듯 어깨를 짧게 으쓱이고 옷자락을 가볍게 정리했다.) 어야. 후회 읎게 무 둘 예정이니께 걱정할 것 없다.
…마, 마지막 날에 내가 말해주겠다 칸 것 기억나나? 점심시간 때 말해줄 테이까, 듣고 싶으믄 온나. 모른 채로 가고 싶다믄 오지 않아도 되구. (눈꼬리를 둥글게 휘며 애먼 이야기를 읊는다.)
 
카이 레스터:(태평한 새끼. 미련한 놈. 듣고 싶지 않은 문장들이 머릿속 욕지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자살 기도라도 하는 게 아니라면 왜 저렇게 구는 건지. 아직 카페인도 축이지 못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묵직한 철문을 밀어 수용실을 나간다.)
 
당신은 그에게 대꾸해주지 않은 채로 수용실을 나섭니다.
 
그리고 그 없이 오전 일과를 보내고, 점심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신은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하나요?
 
주변의 말을 듣자하면, 그는 현재 운동장에 있는 듯 합니다.
 
카이 레스터:(싸구려 교도소 인스턴트 커피가, 이걸로 몇 잔째였더라. 세 잔, 아니, 네 잔째였던 것도 같다. 오전 내내 저기압이었던 만큼 신경질적으로 종이컵을 질겅질겅 씹어 대다가 손아귀에 우그러뜨려진 것을 내팽개치고는 운동장으로 향한다. 결국 아침에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답답함에 돌아 버릴 것 같은 건 내 사정이고, 지금 네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아주 오랜 시간 후회하겠지.)
 
종이컵을 잘근잘근 씹고, 마음을 굳게 잡고 식당에서 운동장으로 길게 이어진 복도를 부지런히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손이 뻗어 나와 당신의 팔뚝을 콱! 붙잡습니다.
 
놀라 뒤돌아보면…
 
에반이 독방에 끌려간 이후로 당신을 멀리하던 로드릭입니다.
 
 
로드릭:카이. 나랑 얘기 좀 해요.
 
카이 레스터:씹, 뭐야, 갑자기. 지금은 바빠. 이따 얘기해. (붙들린 것을 뿌리치고 가던 길을 마저 가려 발을 뻗는다.)
 
 
로드릭:잠깐이면 돼요. …루주와 관련 된 이야기예요.
 
카이 레스터:잘 됐네. 직접 들을 테니까 비켜.
 
 
로드릭:아니. 루주는 말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 사람의 약점이 될 테니까. 정말 잠깐이면,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본다.) ...잠깐이면 돼요.
 
카이 레스터:....... (안면을 길게 쓸어내리며 날숨을 쉬었다가 로드릭을 쳐다본다.) 알았어, 잠깐이다? 뭔데.
 
그는 곧 안색을 환히 하더니, 당신을 인적이 드문 식당 구석진 곳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곤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엽니다.
 
 
로드릭:우선,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나도 에반처럼 독방에 끌려갈까 봐 그동안 멀리했어요. 이건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안해요.
사실 지금도 교도관이 볼까 불안해요. 하지만 제가 알게 된 사실을 꼭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저와 어울려준 보답이예요.
 
카이 레스터:(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이야기를 듣는다.) 그건 별로 상관없어. 실제로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지.
 
 
로드릭:…네.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죠. (입술을 꾹 닫고 있다 말을 이었다.)
루주가 전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교도관과 커넥션이 있었어요.
교도관에게 탈옥 예정자와 탈옥 루트를 고발하면 사형을 사면받는다고 하더라고요.
그가 카이 씨에게 친근하게 구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일 거예요. 그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예요. 카이 씨의 탈옥이 성공하길 기원할게요.
 
듣고도 믿기지 않는 사실을 빠르게 털어놓은 로드릭은 주변에 교도관이 있나 두리번거리다가 황급히 운동장으로 나가버립니다.
 
카이 레스터:(로드릭이 사라진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일전 교도관과 나눴던 미심쩍은 대화도, 방금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자연스럽게 들어맞는다.) 하, 씨....... (폭탄을 던지고 가네. 낯을 덮은 채 상체를 푹 숙였다가 일으켜서는 결국 운동장으로 마저 걷는다. 일단 본인이 뭐라고 할 요량인지는 들어 봐야지.)
 
그제야 이제껏 모호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집니다.
 
그동안 루주의 행동이 이상하긴 했잖아요.
 
정작 본인은 탈옥엔 흥미가 없는 듯 보이면서도 그 준비엔 열과 성을 다해 도와주려 하고…
 
그 이유도 고작 멋있어서라니.
 
…당신과 당신이 파놓은 탈옥 루트를 넘기면 루주가 이득을 얻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카이 레스터:
SAN Roll
기준치: 37/18/7
굴림: 56
판정결과: 실패
 
카이 레스터: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2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그러고 보니 이 그레이월 교도소는 세워진 이래 단 한 명의 탈옥수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죠.
 
그저 보안 시스템이 잘 갖춰진 덕분이라고만 생각했으나…
 
실상은 재소자들끼리 탈옥을 고발하게끔 만든 탓임을 깨닫습니다.
 
운동장으로 가면 루주가 그늘에서 기다리고 서 있습니다.
 
카이 레스터:(표정이 어떻지. 평소에는 내 표정이 어땠더라. 복잡미묘하고 혼란스런 감정을 떠안고 느릿한 발걸음을 옮겨 루주 앞에 선다. 괜히 바닥을 툭툭 치며 돌멩이를 걷어내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시선을 맞춘다.) 왔어.
 
루주:왔나. 오래 기다리가, 내랑 대화 안 허구 싶은 건가 했다. (눈꼬리를 휘며 장난스럽게 웃고서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마아. 늦기 전에 말은 해둬야 허나 싶어가.
니가 누명이라 캐가, 개인적으로 더 알아봤다. 눈지 파악 끝냈구. 마, 알아보는 기 어렵진 않드라.
 
카이 레스터:(무슨 소리인지 파악하는 데에 몇 초 걸린다.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내기에, 눈을 깜빡이다 입을 뗀다.) ....... 찾았어? 그놈을?
 
루주:어잉. 아이, 애당초 내 타겟이었으이까네~ 몬 찾는 기 이상헌 기제. (맑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얘기했다.)
 
카이 레스터:타겟이었다는 게 무슨....... (눈매를 좁혔다가 고개를 저어낸다.) 그래서 누군데? 지금 뭐 하고 있대?
 
루주:내 타겟들은 전부 연쇄살인범이니께. (샐쭉이 웃는 표정을 짓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는 편이 좋을끼다. 니가 우예 헐 수 있는 아가 아이니까.
실은 니가 누명이라는 기 헛소문인 줄 알었는디, 가만 보이까 아이대. 다리도 안 절고, 사소한 습관도 닮은 기 하나도 읎고. 사람들 볼 때마다 쫄아있드마. (키들이는 소리를 낸다.)
 
카이 레스터:(멋쩍은 표정으로 땅바닥을 꾹 눌러 비빈다.) 나름 티 안 낸다고 하긴 했는데, ....... 그래도 그놈이 어딨는지 알아야 내가 혐의를 벗지. 아무리 항소해도 발악이라면서 안 들어 줬다고.
 
루주:마아, 그건 이짝서 알리주께. 교도관들이 내 말이라믄 껌뻑 넘어가그든. 마, 죄수 주제에 그노마들 신뢰를 받는다는 게 웃기지마는. 그제.
 
카이 레스터:알았어. (별다른 대꾸 없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잠시 침묵한다.)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다야?
 
루주:어야. 내가 만약 빠르게 그노마를 직있으믄, 니가 이래 억울하게 잡히 오진 않았을 테니까. 사죄 삼아가 겸사겸사?
 
카이 레스터:섬짓한 소리 그만하고. 내 제안에 대한 답변은 여전히 부정적이냐.
 
루주:……. (그저 둥글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카이 레스터: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30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여태 한 방에 머무르며 그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아니, 이상하잖아요.
 
이제껏 당신에게 교도관과의 은밀한 음모를 숨겨왔던 사람이니까 더더욱이요.
 
연쇄살인마만 골라서 죽였다는 말조차 의문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것이 원론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경찰이 당신에게 일부러 누명을 씌웠겠나요?
 
아마 뚜렷한 진범의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테죠.
 
경찰조차 진짜 연쇄살인마가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루주가 분간할 수 있었겠어요.
 
더불어 그가 죽이려고 했던 진범이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이라는 그 기막힌 우연이 사실일진….
 
내일은 그의 사형 집행일입니다.
 
여태 죽음에 초연한 척 굴었지만, 막상 턱끝까지 다가오자 살고 싶어 진 것일 수도 있겠군요.
 
그는 탈옥하고 싶은 걸까요?
 
아니면, 이대로 죽음을 맞이할 생각인 걸까요?
 
대체, 왜 말을 해주지 않는 걸까요.
 
진범을 안다는 거짓말로 당신을 현혹해서 자신을 데려가게끔 만들어 결국은 탈옥 루트를 온전히 알아내려는 수작일까요?
 
여태 관심 없던 탈옥이 하고 싶어 진 건지,
 
당신을 고발해 사형을 면하고 싶은지.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요, 그저 당신을 흔들어 놓으려고 하는 말이겠죠.
 
무엇보다 그의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가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란 것만은 변함없이 사실입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여럿을….
 
목적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에반을 팔아넘겼던 그때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루주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속 모를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저 캄캄한 속을 파내어 끄집어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시달립니다.
 
카이 레스터:(이리저리 수를 재고 사람의 진위를 따지는 데에도 지쳤는지,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헤집는다.) 됐다, 씨발. 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동안 도와줘서 고마웠어. 나름 정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착각한 건지. ....... 이젠 다 됐으니까 살아, 인마. 뭐가 됐든 살아 보라고.
 
루주:하하! 당장 내일 사형 당허는 사형수헌티 그런 말을 허는 기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니도 살어야지.
 
카이 레스터:웃음이 나오냐? (사람은 입체적이라고들 하던가. 연쇄살인범이라고 해도, 그 속내가 어땠을지는 몰라도, 결국 지난 한 달 동안 자신에게 가장 살갑게 굴어 줬던 이가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니. 무서웠다. 스멀거리는 공포는 분노로 둔갑하고, 순간 욱했다 싶으면 한 발 내딛어 멱살을 쥐고 있다. 이를 바득 갈았다가도 무력감을 발판 삼은 감정은 쉽사리 무너져내린다. 원망 섞인 호소가 눈빛에 깃드는 것을 내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인다.) 제발, 좀. 루주야.
 
루주:(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으나, 표정에 큰 변화는 없다. 네가 이리 나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감정이 차근히 죽어버린 건지 알 수 없다. 떨구어진 머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다, 멱살을 쥔 손을 차분히 도닥였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제안하려면, 완벽하게 준비를 끝내두어야 허지 않것나. 이럴 시간에... 마저 준비혀야지. 내일인디.
 
카이 레스터:(스스륵 힘 빠진 손이 툭 떨어져 허벅지 옆으로 제자리를 찾아간다. 이 와중에도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 더 짜증이 났을까. 걸음을 물리고서도 시선은 미묘하게 아래로 기울어져 있다.) ....... 그래, 이따 봐. (낮은 음성이 대화의 끝을 고하고, 돌아서서 건물 내부로 향한다.)
 
당신은 그를 두고 방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래요.
 
그의 말에는 틀린 말 하나 없습니다.
 
그것이 못내 열이 받을 만큼이요.
 
하지만, 그래요.
 
통로는 거의 다 뚫어갑니다.
 
완벽히 뚫고, 내일 한 번 더 물어보기로 해요.
 
카이 레스터:(몸을 쓰다 보면 잡념은 흐려질 테다. 수용실로 돌아가는 길에 커피 한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켜고, 방에 들어서서는 곧장 책상 뒤 구멍으로 몸을 넘긴다.)
(하관에 실을 힘을 손아귀에 주어 날카롭게 갈려 나간 숟가락을 붙들고 그대로 벽에 꽂는다. 굳은살이 패일 듯 깊은 자국이 남는 것도 모른 채. 땀이 뻘뻘 흐를 때까지 몇 번이고.)
 
당신은 벽을 깊게 파기 시작합니다.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카이 레스터:
근력
기준치: 70/35/14
굴림: 3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퍽, 벽을 파내면...
 
어느순간부터 당신은, 그 너머가 보임을 인지하고,
 
몇 번 더 두드리면, 당신이 지나갈 만큼의 구명이 생겼음을 인지합니다.
 
그러나, 이 너머로 이동하기엔 촉박한 시간이로군요.
 
오늘은 돌아가서 우선 잠을 청하고, 밖이 소란스러울 때 탈출을 감행함이 좋겠습니다.
 
카이 레스터:(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미리 파악해 둘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일단은 설계도의 지식으로 만족하고 수용실로 돌아간다.)
 
이대로 잠에 드나요?
 
그대로 잠들어도, 말릴 이는 없을 겁니다.
 
카이 레스터:(언제나처럼, 탈옥 준비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꼼꼼하게 뒷정리를 하고 샤워 부스로 들어간다. 그토록 고대하던 탈옥 날인데, 내일 해가 뜨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왜 자꾸 울렁일까. 뜨끈한 물줄기 아래 서서 한참 시간을 죽이다가 나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낸다.)
 
당신이 밖으로 나오면, 루주는 이미 잠든 건지, 윗층의 이불이 둥그렇게 말려 있습니다.
 
당신도 잠에 들도록 합시다, 카이.
 
내일을 위해서는, 체력을 비축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카이 레스터:(정말 마지막 밤이 된다면, 잠이라도 푹 자게 둬야지. 루주를 깨울 생각은 않고 취침 전 루틴을 마치면 자신도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당신은 그렇게 잠에 빠져듭니다.
 
.
 
.
 
.
 
아침 새도 울지 않는 고요한 탈옥 실행일이 밝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자, 루주는 교도관에게 불려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수용실 내부엔 메마른 먼지와 싸늘한 공기만이 잔재합니다.
 
당신에게 비밀을 둔,
 
그리고 끝까지 속내를 말하지 않은 루주를 용서하던 하지 않던,
 
복잡한 심경은 여전합니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점호를 치르고, 아침 식사를 하면서도 머릿속엔 루주의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무엇도 쉽사리 결정 내리지 못한 채, 다시금 수용실로 돌아오자…
 
아침 내내 보이지 않던 루주가 돌아와 있습니다.
 
루주:아. 몬 만나는 줄 알었네.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
 
카이 레스터:....... 그게 네 선택이야?
 
루주:음. (짧게 웃음을 걸었다.)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으이 말하것지마는, 내는 니를 교도관헌티 말헐 생각이 읎으이까네.
 
카이 레스터:(입을 꾹 다물며 눈매를 일그러뜨린다.) 마지막이야. 잘 선택해. 루트는 다 뚫었어. 네가 가져다 준 설계도대로라면, 이대로 나가는 데에는 문제 없고.
같이 도망치자, 루주.
 
그와 대화를 나누는 중, 회색 벽에 그늘지는 창살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양이 머리 한가운데에 내리쬐는 시간.
 
창살이 가지런한 수평선을 만들어 내는 때가 루주의 사형 집행 시간입니다.
 
차츰 기우는 그림자가 올곧게 세워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합니다.
 
결정해야만 하는 때죠.
 
루주는 연쇄살인마이며, 당신은 그와 같은 죄목을 가진 연쇄살인마에게 누명을 쓴 무고한 피해자입니다.
 
한 달간 루주와 많은 것을 나누고 웃고 즐겼을지 모르겠으나, 함께 탈옥할지 말지는 또 다른 문제일 겁니다.
 
당신의 정의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나요?
 
선택지는 다양합니다.
 
당신에게 고개를 내젓는 루주를 억지로 끌고 함께 탈옥할 수도,
 
그를 놓고 혼자 갈 수도,
 
아니면 아예… 탈옥을 포기하는 방법도 있겠죠.
 
카이 레스터, 어떻게 하고 싶나요?
 
카이 레스터:누가 나 때문에 죽어 달랬냐....... (시계의 바늘들이 차츰 하나로 겹쳐져 가듯 곧게 세워지는 그림자를 보며 초조함이 쌓여 간다. 이대로 밍기적거리다가는 탈옥마저 실행에 옮기지 못할 테다.)
내가 살라고 했지, 이 멍청아.
(뒤쪽의 철문을 힐끔 살피고 루주를 노려본다. 협조할 의지조차 없는 이를 데리고 빠듯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도박이겠지. 그래도. 충동적으로 그 소매를 끌어 단단히 쥐고, 책상을 치우면 드러나는 구멍으로 그를 떠민다.)
 
루주:으엉? (소매를 붙잡히면 당황한 낯을 지은 채로 질질 끌려간다. 네가 먼저 들어갈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먼저 너머로 데굴 굴러 들어간 건 이쪽이었다. 구멍에 반쯤 다리를 걸치고 드러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주섬 몸을 일으켰다.) …왐마.
박력 있다꼬 웃어야 허는 타이밍인가……?
 
카이 레스터:나도 몰라, 젠장.
(얼만큼 먹힐지는 몰라도, 서둘러 두 침대의 이불을 뭉쳐 사람이 누워 있는 양 꾸며 놓고 설계도를 챙겨 자신 역시 구멍 너머로 몸을 옮긴다. 책상 다리를 끌어 반대편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가려 둔 뒤 신경을 곤두세우며 환기구로 향한다.) 얼른 따라와.
 
과연 옳고 그른 것은 무엇일까요?
 
루주는 사형당해 마땅한 죄인인가요?
 
아니면 사회의 악을 직접 뿌리 뽑는 영웅인가요?
 
전자든 후자든 그를 사형대에 올려 보낼 순 없습니다.
 
뭐, 그게 당신에게 중요한 요소도 아니었습니다.
 
그를 등지고 탈옥한단들, 영원히 잊지 못하고 기억할 당신을 잘 알기 때문이죠.
 
기어코 당신의 정의는 루주에게로 기울어집니다.
 
설령 이것이 루주에게 속아 넘어간, 잘못된 선택일지라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 당신의 정의에 대한 결심입니다.
 
루주:니 이래도 되는 기가? 실수믄 우얄라구 이라는데. (책상으로 막혀버렸고, 지금 가서 나서봤자 교도관에게 네 탈옥이 빠르게 들킬 뿐이겠지.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뒤를 흘끔 보고 뒤를 따라 살금살금 움직였다. 걸음소리 없어, 느긋하고 조용하게.)
 
카이 레스터:그게 걱정이었으면 진작에 교도관한테 꼰질렀어야지. (팔꿈치로 엉금엉금 기어 환기구 속을 지나간다.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는 공간에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만이 길게 이어진다. 루주에게 당한 피해자들을 간접적으로도 본 적이 없어 가능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지금 하는 짓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나라에게 버림받은 개인에게 정의를 포기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행위였으니. 그냥. 고요함 속에서 속살인다.) 네가 죽는 게 무서워졌어.
 
루주:(이렇게 따라가면 되는 건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 짧게 미소를 걸었다. 두 사람이 있는 공간만을 고요히 울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전해진다. 옷자락에 먼지가 묻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제 이런 수감복은 어찌 되든 상관 없는 천조각이 되어버렸는데. 네가 어떤 생각으로 이러한 선택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필시 후회하지 않으리라. 선물을 두고 왔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몸을 끌어 나아가다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무습다고? 와?
 
카이 레스터:(반대편에 도달해 먼저 조심스럽게 환기구의 철판을 들어내고 주변을 살피며 밖으로 몸을 빼낸다. 수용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했을까. 아직 접대 준비로 정신이 없을까. 안전한 것을 확인하면 돌아서서 손을 뻗는다.) 나는 누구랑 다르게 내가 아는 사람의 죽음이 익숙하지 않거든. 뭣보다, .......
네가 없으면 슬플 것 같아. 믿어 준 거, 네가 처음이었어.
 
루주:(이 즈음이면, 아마 접대 준비로 정신 없겠지. 아, 아이다. 있어야 할 내가 읎어진 걸 알아삐가 마이 놀랐을라나? 어쩌면 지금 즈음 교도관들을 풀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뭐, 내가 설계도를 빼돌렸으니 시간이 좀 걸리겠다만은. 밖으로 반쯤 몸을 빼고 주변을 둘러보다, 내밀어진 손을 붙잡고 밖으로 몸을 빼내었다.) 맞나~ 내라고 익숙한 건 또 아이긴 헌데.
허이고. 보는 눈이 다들 윽시 읎는갑네...
 
카이 레스터:(어깨를 으쓱이며 철판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에는 곧장 뒤편의 박스를 슬쩍 밀어내고 구멍 너머로 고개를 뻗는다. 밍기적거려서 좋을 것 없으니. 긴장한 심장이 갈비뼈를 쿵쿵 쳐 대는 것 같아 마른 침을 삼키며 입술을 잘근거린다. 아직 평소처럼 아무도 없는 설비 공간에 두 발을 딛고서는 넘어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래도 되냐는 질문은 내가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뭔 바람이 들어서 목숨줄 연명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루주:(뒷모습만 언뜻 보아도 긴장한 것이 훤히 보인다. 그것에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어 짧게 웃음을 터뜨리고 너를 도와 살짝 힘을 주어 넘겨준 뒤에 뒤따라 성큼 걸음을 넘기고 상자 틈으로 손을 밀어넣어 원래 자리로 돌려두었다.) 음~ 하하.
내 스스로 기회를 걷어차진 않었는디. 그래 보있든가?
 
카이 레스터:내 정보 넘길 생각 없다며.
(뚱한 눈빛을 보내고는 두 번째 환기구 속으로 몸을 눕힌다. 이 짓도 몇 주 해 봤다고 소리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익숙하다. 교도소를 빠져나가면 어디로 가야 하지. 신분을 위조해야 할까. 애초에 잡히지 않고 이곳을 벗어날 수는 있을까. 지금쯤 교도관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땀 맺힌 손바닥을 연신 쥐었다 펼치며 좁은 통로 안을 이동한다.)
 
루주:그래가 니가 이래 끌고 왔다 아이가.
(웃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히고 따라갔다. 설계도를 주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길을 찾을 정도로 보는 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뒤를 생각하는 듯한 뒤통수를 가만 바라보다,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을 부지런히 따랐다. 한 달 내도록 다녀서 그런가, 제법 익숙한 모양새다. 뒷일은 별달리 생각하지 않는 듯 긴장하지 않은 낯으로 쭉쭉 움직였다.)
 
카이 레스터:(여전히 세상 태평하게 웃으면서 하는 말을 듣고는 혼잣말로 궁시렁거리며 예배실로 몸을 내린다. 이곳의 시간은 박제된 것처럼, 따사로운 햇살이 공간을 물들여 고요하게 빛난다. 어쩌면 이곳에서 너와 함께 기도를 올렸을 때부터 전부 글러먹었던 건지도 모르지. 발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먼저 화분 쪽으로 가 몸을 수그린다.)
 
루주:(이번에는 도울 생각이 없는 듯, 주변에 우두커니 서서 예배실의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 열릴지 지켜라도 보자는 양.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어느 정도 소요됐음에도 불구하고, 바깥은 조용하다. 수감실을 잠시 비웠을 것이라 생각하기라도 했나? 확실히, 사형 집행 당일에 탈옥을 감행하는 미친 놈은 아무래도 드물 테니까. 허를 찌른 것일지도 몰랐다. 그도 아니면, 대접할 이들에게 나쁜 모습을 보일 순 없으니, 이 상황을 모르는 척 했다거나.)
 
카이 레스터: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네....... (폭풍전야 같은 평온함이 되려 불안하다. 이쪽이야, 일러 둔 뒤 화분을 치워 마지막 구멍 너머를 살핀다. 이 뒤로는 자신도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론으로만 알고 있는 지식에 발등 찍히지 않기만을 바랄 뿐. 떨리는 숨으로 심호흡을 하고 네 손을 끌어 반대편으로 조심스레 몸을 빼낸다.)
 
루주:그르게. 무신 속셈인 긴지 윽시 조용허네. 아, 됐나? (화분이 치워지면 구멍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와, 뚫긴 윽시 잘 뚫어놨네. 하는 작은 감탄을 두고서 먼저 넘어가면 뒤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돌아가는 게 더 고역이다. 얌전히 따라가기로 한다.)
 
카이 레스터:(화분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주머니에서 설계도를 꺼내 펼친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가 본 적 없으니까 잘 따라와. (처음 예배실의 벽을 뚫기 시작했을 때부터 수십, 수백 번도 더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던 길을 육안으로 한번 더 확인하고, 환기구에 들어선다. 이제 정말 코앞이라 생각하니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아 오히려 붕 뜬 기분이 든다. 반 접힌 종이를 입에 문 채 몸을 움직인다.)
 
루주:어야~ 이대로 따라가기만 허믄 되는 긴가? (조금은 장난기마저 담은 얼굴로 웃고서 근처를 기웃였다. 아무 지식 없이 설계도를 본다고 해서 전부 알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렴 됐나. 네가 길을 볼 줄 아는 것 같으니. 안으로 들어서면 몸을 꾹 밀어넣어 졸졸 움직였다. 이래 불편한데두 잘만 움직이네.)
 
카이 레스터:(적힌 것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 너머의 오물 처리장에는 밖으로 이어지는 폐수관이 있을 것이다. 하루만 더 시간이 있었어도 좀 더 완벽한 준비를 할 수 있었겠지만. 이 정도도 감지덕지인가. 슬슬 뻐근해지는 팔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환기구의 끝에 다다르자 악취가 풍기는 것이, 길을 제대로 찾았다는 사실을 귀띔해 준다. 얇은 틈으로 바깥을 살핀 뒤 철판을 밀고 좁은 공간에서 몸을 꺼낸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 아마.
 
당신이 밖으로 나서면, 발목을 기분 나쁘게 적시는 폐수의 악취가 온몸을 감쌉니다.
 
하지만 저 앞에 하얗게 빛나는 출구가 보이는 이상,
 
다른 불쾌한 감각은 더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길었던 인고의 시간 끝에 결국 맛보게 될 자유가 손을 뻗으면 잡힐 만큼 가까이 존재하니까요.
 
루주:……내가 보기에도 그래뵌다. 악취가 생각보다 심해가 놀랐지마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걸고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음. 그러니까... 꽤, 놀랍네.)
 
카이 레스터:좀 심하긴 하네. (작게 웃으며 인상을 찌푸리지만, 그딴 게 뭐 대수일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설계도에 그려진 폐수관 입구 근처를 서성이다가 쓰레기 더미 뒤에서 쇠창살을 찾아낸다.) 루주, 이쪽인 것 같아.
(묵직한 것을 당겨 길을 트고, 앞장서서 발을 뻗는다.)
 
루주:(앞장서서 발을 뻗으면, 잠시 머뭇거리고 있다, 곧 앞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차마, 닿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 다시금 걸음을 둔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다리를 움직여 곁에 서 움직였다.) …… 음.
 
시야를 시리게 하는 하얀빛은 우리의 걸음에 따라 점점 그 범위를 늘려갑니다
 
이윽고 전신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빛으로 발을 디디면,
 
아.
 
쾌청한 하늘과 지평선 쪽으로 쭉 뻗은 도로가 보입니다.
 
하수처리장으로 콸콸 쏟아내는 폐수관에서 완전히 벗어나 도로 위를 밟고 섭니다.
 
정돈된 회색 감옥의 바닥이 아닌, 울퉁불퉁한 콘크리트가 느껴집니다.
 
메마른 공기 대신 여름의 향을 품은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어두침침한 회색 벽 대신 푸릇한 초목이 시야 끝에 자리합니다.
 
교도소에 갇히기 전에는 너무도 일상적이었던 모든 것이,
 
자유라는 이름아래 특별하고 숭고하게 반짝입니다.
 
카이 레스터:.......
(고작 길바닥 위에 서 있을 뿐인데, 상 정상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지나치게 고요하다. 별것 아니어서, 익숙해서, 지극히 평범해서. 그렇기 때문에 사무치도록 그리웠던 풍경에 스미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고여 떨어진다.) 나왔, 어.
(밖이다. 헛웃음이 새고, 환호성을 지를 뻔한 충동을 겨우 억누른다. 내일이면 탈옥수들에 대한 뉴스가 전국에 보도될 것이다. 어쩌면 오늘 저녁일지도 모른다. 당장도, 갈아입을 옷을 구하지 못하면 누군가의 눈에 띄어 신고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자유다. 벌어진 입꼬리를 굳이 숨기지 않은 채 돌아서서 옆에 선 이를 와락 끌어안는다.)
우리, 우리 진짜 밖이야.
 
루주:(바람이 분다. 교도소에서 느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바람이. 실상, 그런 일을 하며 내가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어찌 되든 의연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깨의 힘이 느슨히 풀리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를 이래 끌어안아두 되는 기가? (나른히 터진 웃음에도 네가 안아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뒤로 두어 걸음 밀려 물러났을 지언정, 마주 몸을 안아주고서 등을 도닥였다. 네가 진정할 때가 되면, 나긋이 목소리를 읊었다.) 고맙다.
내, 계속 나가곤 싶었그든.
마, 이제 됐다. …음. 그래. 낼 살펴주는 김에 니두 살펴주길 말해봐야 쓰것다. 누명이 벗겨질 때까지만…….
 
카이 레스터:(사람에게 정을 붙이는 데에 호화로운 평화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목숨 걸린 상황에서의 생존인 법이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불안으로 요란스럽던 심장이 기분 좋게 뛰어 댄다. 약간은 갑갑할 정도로 꽉 껴안고 있다가, 흥분이 가시면 그제야 한 걸음 물러나 주고는 장난스레 옆구리를 쿡 찌른다.)
거 봐, 나오니까 좋지.
(고개를 뒤로 젖혀 탁 트인 창공을 올려다봤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네 팔을 가볍게 끌어당긴다. 그리곤 그대로 느긋하게 도로를 따라 걷는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도록, 가능한 멀리 도망쳐야 하니까.) 나는 집으로 못 돌아갈 것 같은데 어떡하냐. 한동안은 너한테 신세 좀 져야겠네.
 
루주:괘안타. 한 사람 정도는 더 거둬줄 테이까. 내가 이깄그든. (슬쩍 웃고서 몸을 조금 떨어뜨렸다.) 따라온나. 니가 여까지 내를 안내해줬으이, 지금부터는 내가 니를 안내헐게.
 
당신의 정의로 살린 루주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그의 행보가 궁금하다면 자유로 향하는 길을 함께 걷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마침내 우리의 얼굴로 냉기 어린 탐조등이 아닌, 따스하고 안온한 햇살이 비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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